『삼국유사』「탑상」편에는 ‘남월산을 감산사라고도 한다[南月山亦名甘山寺]’고 하였다. 절의 위치가 토함산의 남쪽 자락이다. 불국사 석가탑 사리함에서 나온 ‘묵서지편’에 의하면 토함산을 월함산(月含山) 또는 함월산(含月山)이라 했다. 사실 기림사가 있는 함월산과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은 크게 보면 하나의 산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토함산을 일컫던 월함산 · 함월산을 줄여 ‘월산(月山)’이라고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절 감산사의 뒷산이 토함산 즉 월산의 남쪽에 있으니 남월산이라 했을 것이다.
감산사(甘山寺)의 한자 훈과 음은 ‘甘(달 감)’ ‘山(뫼 산)’이다. 당시 ‘감산’을 이두로 표기했다고 보면 ‘달산’, ‘달뫼’가 된다. 토함산 즉 월산의 남쪽 자락에 있는 이 절을 ‘달산사’ 혹은 ‘달뫼절’ 이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감산사가 된 것은 아닐까?
옛 서라벌은 ‘달[月]의 땅이었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14수의 향가 가운데 달이 등장하는 작품은 5편이나 되는데 해가 등장하는 작품은 단 한 편도 없다. 그리고 신라 왕성의 이름이 월성(月城), 신월성(新月城), 만월성(滿月城)이었고, 별궁도 월지(月池)였다. 또 월성 안에 월상루(月上樓)라는 누각이 있었고, 제망매가를 부른 월명사(月明師)가 피리를 불며 거닌 마을도 월명리(月明里)였다. 당시 달[月]과 관련이 있는 산도 함월산, 남월산, 백월산, 만월산, 월생산이 있었다. 화랑의 별칭이 풍월도(風月道)였으며, 달과 관련이 있는 궁중의 여인으로 경덕왕의 후비인 만월부인, 진덕왕의 어머니 월명부인도 있었다.
그래서 감산사는 월산사, 달산사, 달뫼절로 불리며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하늘의 달과 함께 친근한 절이었을 것이다.
감산사지는 경주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옛 사찰로 원성왕릉에서 동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위치에 있다. 『삼국유사』에는 왕성에서 20여 리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월성에서 이곳까지의 실제 거리는 14Km가 조금 넘는다. ‘리’의 단위가 당시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을 지나 동해구 감포로 가는 국도 제4호선 터널이 토함산 즉 월산 남쪽을 뚫고 2014년 개통되었다. 그런데 ‘감포(甘浦)’의 ‘甘(달 감)’도 신라사람들에게는 ‘달’이라는 의미를 가진 ‘달맞이 포구’였을 것이다.
산사지는 오래전 박물관대학 답사를 비롯하여 몇 차례 찾은 적이 있다. 그러나 찾아가는 길이 간단치 않아 네비게이션의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번 원고를 쓰면서 1주일 간격으로 두 차례나 찾았는데도 번번이 절 뒤 좁은 길로 안내를 받았다. 목적지를 감산사지로 입력을 하니 ‘감산사지 삼층석탑’이 화면에 표시되어 이를 목적지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감산사지’가 아닌 ‘감산사’로 입력을 해야 한다. 네비게이션이라는 것도 너무 믿을 것이 못 된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다. 틀린 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믿는 것을 ‘사신(邪信)’이라 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덮어 놓고 믿는 것은 미신(迷信), 다른 사람이 믿으니까 그냥 믿는 것을 맹신(盲信)이라고 한다. 편리하다고 해서 무조건 네비게이션을 믿는 이런 경우는 맹신이다.
감산사는 본전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향해서 우측으로 극락전과 산신각이 있고 좌측 뒤편으로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마당 동쪽으로는 지성당(志誠堂), 서쪽으로 금당(金堂)이 있다. 지성당 왼편에 있는 작은 건물이 종무소이다. 마당 앞으로는 최근에 조성한 자그마한 3층석탑이 있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3층석탑은 대적광전 뒤에 있다. 과거 기록을 보면 대적광전의 서편 축대 위에는 감산사지삼층석탑 1기 외에 별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작은 불당 2채만이 있었는데, 최근 중창 불사로 넓은 대지에 화려한 건물이 찾는 이를 주눅들게 한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 탓인지 찾는 사람이 없다. 단지 종무소에 처사 한 분이 백구와 무료함을 달래고 있고 보살 한 분이 지성당 청소를 하고 있을 뿐 이 절을 찾은 사람은 오직 나 혼자 뿐이다. 어디서인가 황소개구리 우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