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검석인상 바깥쪽으로 직육면체의 편평한 돌 위에 크고 우람한 서역인 모습의 무사상이 있다. 동쪽 무사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왼손은 철퇴를 거머쥐고, 오른팔은 굽혀서 불끈 쥔 주먹을 오른쪽 가슴에 대고 있다. 서쪽 무사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오른손에는 철퇴를 잡고, 왼팔은 굽히고 있어, 마주보는 무사상과는 반대 동작을 취하고 있지만, 다 같이 능을 지키기 위해 입구인 남쪽을 바라보며 버티고 선 모습이다. 두 상 모두 크고 우람한 몸체를 약간 뒤로 젖히고, 고개와 허리를 약간 돌린 모습인데 얼굴 모습이 특이하다. 동쪽 무사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 팔꿈치를 굽혀서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에 대고 있다. 왼팔은 펴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굵고 힘찬 팔뚝을 드러내고 있는데, 배꼽까지 올라오는 울퉁불퉁한 몽둥이를 쥔 손은 쇠같이 힘차 보이면서 살아있는 듯하다. 소매를 빼고는 옷자락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만큼 몸피가 탄탄하다. 옷은 간편한 차림인데 오른쪽 허리춤에는 둥근 주머니를 차고 있다. 이는 산낭(算囊)이라는 것으로 호인[胡人, 옛 중국 북방과 서방의 이민족]들이 당나라 장안성에 거주하면서 주머니에 계산하는 기계 즉 주판 같은 것을 넣고 다닌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쌍꺼풀의 부릅뜬 큰 눈은 치켜 올라갔고 두드러진 눈썹은 숱이 많은데, 눈과 눈썹 사이가 좁다. 콧등이 우뚝한 큰 코는 밑 부분이 넓고, 끝이 처진 매부리코인데, 콧수염은 팔(八)자로 양 끝이 말려 올라갔다. 큰 얼굴에는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다문 입가가 약간 처져 있는데 힘이 용솟음치고 있다. 귀밑으로 흘러내린 곱슬수염은 숱이 많고 길어, 목을 덮고 가슴까지 닿고 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목 뒤로 흘러내렸고, 머리 위에는 중앙아시아식 터번을 썼다. 머리를 돌리고 있는 것과 힘의 균형을 맞추도록 반대 방향으로 틀었던 몸체는 허리 부분에서 다시 처음 방향으로 돌려 ‘S’자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되니 한쪽 다리에 힘이 실려 언제라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감 있게 버티고 선 모습과 팔의 자세, 손에 쥔 무기, 얼굴 표정 등은 능에 고이 잠드신 왕의 영혼을 지키기에 충분한 형상이다.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큰 이 인물상은 바로 8-9세기에 신라에 내왕이 잦았던 서역 사람, 즉 아리안계나 터키계통의 사람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에는 많은 아랍 · 무슬림들이 왕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기록이 있고, 또한 이 조각상 자체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자료가 된다. 이 무사상을 통하여 신라와 서역 사이의 문화 교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고 이 왕릉이 만들어진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을뿐더러 신라인들의 창조성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임영애 교수는 우락부락한 이 무인상이 이전의 다른 연구에서 보아온 중앙아시아인이 아니라 불교의 금강역사라고 주장한다. 무인상의 옷이 호인의 복장이 아니라 사천왕의 갑옷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사찰 입구에 금강역사를 세워 수호신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인물상 역시 금강역사로 보았다. 중앙아시아인을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세계제국 당나라가 만든 표준화된 동아시아 불교 미술의 영향 아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능 입구에는 팔각기둥으로 된 화표석(華表石) 1쌍을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하였다. 이 화표석은 이곳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왕릉의 홍살문처럼 왕릉의 영역을 나타내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표석 맨 위에는 아소카석주와 같이 장식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저승에서 아킬레우스를 만나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살아있을 때 굉장한 숭앙을 받았는데, 죽어서도 이렇게 죽은 자들 사이에 왕 노릇을 하니 얼마나 좋으냐?” 이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가 말했다. “죽어서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보다 살아서 아무 재산도 없는 사람 밑에서 종살이를 하는 게 더 낫다” 우리 속담에도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가장 완벽한 능에 잠들고 있는 원성왕이 어쩌면 살아있는 나를 부러워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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