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하는 이유는 몸과 마음이 정말 함께할 때 사람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현실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할 때만 해도 그렇다. 한 걸음 한 걸음 다리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나 마음은 눈이 보는 대로 마구 흔들린다. ‘못 보던 카페가 생겼네, 언제 한번 가봐야겠다’하고 몸은 가던 길을 가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카페 안이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고 브런치는 나쁘지 않다고 다음 모임도 여기로 할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러다 뜬금없이 ‘어? 그러고 보니 세금고지서를 어디에다 뒀더라?’ 하고 내일까지 납부해야 할 고지서를 떠올리면서 마음은 역시 상상 속에서 온 집안을 들쑤신다. 마음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작업은, 육체가 만드는 동선(動線)과는 달리 아주 비예측적이며 즉흥적이다. 찰나(刹那)라는 말이 딱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음은 몸에서 벗어났다가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로 또 저기로 주제를 옮겨 다닌다. 현실적으로 우리 마음은 웬만하면(?) 몸과 함께 하질 않는다.
만약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을 해 있다고 치자. 정신은 멀쩡한데 몸은 불편한 상황이다. 저염식의 식사, 병원 특유의 답답한 공기, 쉼 없이 왕왕거리는 텔레비전 등은 맨 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상태다. 병원에 오래 있다 보면 몸이 나아지는 것만큼 마음은 그 반대라는 걸 경험한다. 이렇게 몸과 마음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는데도, 둘은 함께 하질 않는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가 극대화된 상태가 혼비백산(魂飛魄散) 아닐까 싶다. 혼이 날아다니고 (혼)백이 분산되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어지럽게 흩어져버린 상태다. 가령 밤새 타이핑한 레포트를 저장도 하지 않고 노트북 전원을 뽑아버렸던 때가 그렇다.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내가 아는 선배 한 분도 이런 케이스다. 논문 마감일을 맞추려 밤새 울고 불며(!) 타이핑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 뭐해?” 자다가 엄마가 없어진 걸 알고 놀란 4살짜리 꼬맹이가 와락 뛰어들었고, 미처 저장도 하지 못한 논문을 바로 눈앞에서 날려버렸다. ‘자동 저장’ 기능을 몰랐던 선배는 빠져버린 코드 앞에서 정말이지 혼비백산했다.
삶 속 많은 불행과 슬픔도 몸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는 순간 생긴다. 몸은 한발 한발 정상을 향해 디디는데 마음은 이미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가있으니 말이다. 산꼭대기든 회사의 가장 높은 자리든 눈으로는 금방 가닿아 있는데, 현실은 여전히 한 걸음 또 한 걸음이니 그 차이만큼 아프고 불행한 것이다. 심장, 폐, 다리 근육, 어디 하나 꿀릴 게 없는 인간이 개와 달리기 시합만 하면 백전백패인 까닭은, 개는 그냥 냅다 달리기만 하는데 인간은 달리는 와중에도 마음은 끊임없이 다른 데를 돌아다녀서란다. 개는 몸과 마음을 다해 달리는데, 인간은 ‘아직도 반이 남았네, 혹시 이러다 지는 거 아냐?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닌 걸...’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느라 에너지를 엉뚱하게 써버린 결과란다.
그렇다고 몸과 마음이 물과 기름 관계냐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 치과 병원이 그 좋은 예다. 이제 이름이 불리고 진료용 의자에 앉아 턱받이를 하는 순간, 평소 안 들리던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마음이 육체적 변화를 이렇게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있다니 놀라운 순간이다. 그러다가 의사 선생님이 윙~ 하고 모터 소리를 내며 뭔가를 이빨에 대는 순간부터 몸과 마음은 아주 찰싹 달라붙는다. 일초 일초를 긴장한 몸과 그만큼 긴장한 마음이 함께 견뎌내는, 아주 신기한 경험을 누구나 한다.
그럼 치과처럼 특수한 상황 말고 일상생활에서 육체와 정신을 일치시킬 수는 없을까? 종교에서 묵상(默想)을 권하고 ‘알아차림’ 수행법을 제안하는 이유다. 코로 들락거리는 숨을 가만히 지켜보기도 하고, 하나 둘 번호를 붙여가며 숨을 쉬어도 본다. 자꾸 연습을 해야 할 정도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녹록지 않는 ‘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