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릉에 대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조에 능묘와 관련하여 ‘원성왕이 재위 14년 만에 돌아가시니 유해(遺骸)를 유명(遺命)에 따라 봉덕사 남쪽에 화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능묘를 조성했다는 내용이 없다.
『삼국유사』 「왕력」편 ‘원성대왕’조에는 원성왕의 능에 대해서 ‘능은 곡사(鵠寺)에 있는데 지금의 숭복사(崇福寺)이며 최치원이 찬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하여 능이 조성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원성왕릉의 남쪽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에 있는 숭복사지에서 15조각의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최치원의 문집에 있는 4개의 비문 즉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에 ‘초월산대숭복사비명’의 일부 조각이다. 이 비문에는 원성왕릉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 798년 겨울에 대왕께서 장례에 대해 유언하시면서 인산(因山)에 능을 쓸 것을 명하였으나 땅을 가리기가 어려워 이곳에 있던 곡사(鵠寺)에 쓰려고 하자 ‘절 자리를 빼앗는 것은 좋지 못하다’하여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다. 그러나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어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된 땅으로 만들어 세속을 구하는 것이며, 훌륭하고 좋은 곳에 자리 잡게 되면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라는 주장에 밀려 이곳에 왕릉이 들어서게 되고 곡사는 지금의 숭복사 터로 옮겼다. 이때 절 부근의 땅이 국유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릉지 100여 결(結)을 벼 2,000섬에 매입하여 능을 조성하였다’
현 원성왕릉 자리에 있던 곡사를 능 남쪽에 있는 말방리에 있는 숭복사지로 옮기고 이곳에 왕릉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왕의 위력으로 절을 임의로 옮기게 한 것이 아니고 벼 2000섬으로 그 값을 치렀다는 것이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서 전(錢) 1만 문(文)으로 토지신에게 땅을 매입해서 왕릉을 조성했다는 기록과도 대비가 된다.
사적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지름이 약 23m이고 높이는 약 6m이다.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과 같이 지대석 위에 높이 95cm, 길이 120cm 크기의 판석으로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전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려져 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수법은 신라 십이지신상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왕릉의 둘레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깐 회랑이 왕릉을 두르고 있으며 회랑 둘레에는 높이가 2.7m되는 25개의 석주를 세우고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돌기둥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사이에 끼웠던 난간 살대는 거의 망실되어 새로 보완하였다. 무덤의 조성 연대로 볼 때 횡혈식석실분으로 봉분의 내부에는 돌방이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의 능묘는 인도의 산치대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왕즉불(王卽佛)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릉의 봉분 북쪽 산록으로부터 봉분 북쪽 주변으로 물이 새어 나오고 있다. 그래서 도랑을 만들고 돌담을 쌓아 왕릉 쪽으로 물이 쓰며드는 것을 막고 있다. 물이 쓰며들면 장지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인데 널을 걸어서까지 장례를 치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도 벼 2000섬이나 주면서…
하지만 이는 필자의 좁은 소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물이 나오는 터를 길지로 여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앞면에 안상(眼象)이 조각된 상석이 놓여 있다. [네 편의 비문 중 하나가 이곳 경주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으로 대숭복사비는 화엄종 계열의 왕실 원찰인 대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문이다. ‘사산비명’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연대 상으로 훨씬 앞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사실(史實)을 담은 제1차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