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에서 코로나19로 바뀐 문화가 있다면 단연코 실시간 비대면 강의이지 싶다. 인터넷 환경에서 교수가 가상의 강의실을 개설해 놓으면 학생들이 방 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해당 강의실로 입장해 비대면 수업이 시작된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소위 일타강사님의 고급진(!)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자라 온 학생들은 실시간 온라인 강의가 익숙하다. 문제는 교수다. 처음 시도하는 거라 모든 게 어설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유명 유튜버의 영상을 보며 연구라도 해놓을 걸 후회막급이다.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 쳐다보랴, 채팅창에 실시간으로 쌓이는 학생들 질문에 답글 쓰랴, 수업에 써먹을 관련 자료 제때 켜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업 도중엔 다들 꺼놓기로 한 마이크를 누군가 잘못 만졌는지 “밥 먹고 게임하라니까!” 하는 어느 어머님의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수업은 웃음바다가 된다.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아들이 컴퓨터 게임하고 노는 줄 아셨나 보다.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다 보니 가장 그리운 건 학생들 시선이다. 수업을 잘 따라오는지 엉뚱한 생각들 하는지를 정확하게 말하는 그 눈빛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없어 비대면 수업은 상당히 불편하다. 온라인 강의는 마치 벽을 보고 강의하는 느낌이라고들 하던데 무슨 느낌인지 공감이 된다. 또 있다. 앉는 위치로 학생들의 성격을 유추해보는 나만의 취미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아쉽다. 강의 첫날 쭈뼛거리며 들어온 학생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게 되는데 그 자리는 보통 종강 때까지 쭉 고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앉는 위치에 따라 학생들 성격도 어느 정도 정해진다는 거다. 가령 벽을 등지고 앉는 타입만 해도 그렇다. 원래 벽을 등진 위치는 유리하지가 않다. 도망치기도 애매하고 뭔가 압박을 받는 느낌도 든다. 맹수나 적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에 벽을 등진다는 건 아주 위험하다. 하지만 환경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엄호 속에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자리를 선호한다고 한다. 360°에 가까운 시야를 확보하는 파리와 달리 인간의 시야는 18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체 공간의 반 정도만 맨눈으로 파악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때 만약 등 뒤로 벽이 있다면 위험의 반이 제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직사각형 강의실에서 이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칠판이 멀어 노트 필기를 잘 안 해서인지 학점들은 별로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제일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다. 벽을 기댄 학생들은 발표나 질문 등 적극적인 태도라기보다 관조라고나 할까 관망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오프라인의 이런 뒷자리 학생들이 그립다. 창가를 선호하는 타입도 그렇다. 사람은 보통 비행기나 버스 좌석을 예매할 때 창가 쪽을 선호한다. 커피숍에 예약 전화를 할 때 모임이 중요할수록 창가 쪽 자리가 있는지 물어보게 된다. 드라마·영화에서도 회장님이나 회사의 고위직은 바깥 풍광을 응시하며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장면을 흔히 본다. 밖을 쳐다볼 수 있는 유리창 숫자와 권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 하필 유리창일까? 직사각형 빌딩에서 유리창 두 면이 동시에 트인 공간은 층당 딱 네 군데밖에 없다. 희소성이 곧 권력인 셈이다. 창밖 풍경은 사물을 인식하는 범위를 넓혀준다. 문제는 여기가 학교라는 점이다. 그룹 회장이야 탁 트인 곳을 바라보며 산적한 고민거리를 해결하겠지만, 실기 과목이 아닌 이상 강의는 창밖이 아니라 칠판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봐도 긴장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가끔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성 친구 생각에 입 꼬리가 올라가는 젊음도 건강하고 아름답다. 아니 솔직히 부러운 거다. 기억을 끄집어내다 보니 대면 수업 시절이 더욱 그리워진다. 실제 대학에 와보지도 못한 신입생들에게 학식 최고의 메뉴는 도서관 뒷 건물의 비빔밥이고 계산대 할머니에게 잘 보이면 계란 두 장을 올려주는데도 2500원이라고 소개하면, 컴퓨터 너머 여기저기에서 “우리 같이 비빔밥 먹어요”, “언능(얼른) 학교 가고 싶어욤(싶어요)!” 하고 병아리처럼 조잘댄다. 하루빨리 대면 수업을 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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