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징조의 길몽, 크게 운수가 풀릴 용꿈, 아무 의미가 없는 개꿈, 불길한 징조의 흉몽, 무서운 악몽, 미래를 보여주는 예지몽, 아기를 점지해 주는 태몽 등 꿈의 종류가 참 많다. 꿈을 꾸고 해몽을 잘해 왕이 된 분도 있었다.
이성계가 청년 시절 설봉산의 귀주사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심신 단련과 독서로 소일하던 어느 날 이런 꿈을 꾸었다.
쇠지팡이로 자신의 머리와 허리와 팔 세 곳을 꿰었고, 또한 거울이 깨지고 꽃이 떨어지는 꿈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가까운 토굴에서 수도하고 있던 무학을 찾아가 해몽을 부탁한다. 꿈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듣고 난 무학은 벌떡 일어나 이성계 앞에 큰 절을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쇠단장이 몸을 세 곳 찔렀으니 임금 왕(王)자요 꽃이 떨어짐은 열매가 맺힐 것이요, 거울이 깨짐은 소리가 있을 징조입니다. 이는 그대가 장차 왕위에 오를 꿈입니다”
이성계가 또 이런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양을 잡으려고 하는데 양의 뿔과 꼬리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놀라서 꿈을 깼다. 괴이하게 생각한 그는 무학(無學)스님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렇게 해몽했다. “한자의 ‘羊’에서 뿔과 꼬리가 떨어져 나가니 ‘王’이 될 꿈이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원성대왕’조에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각간으로서 상재인 김주원의 다음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꿈에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해몽을 하는 사람을 불러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12현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했다. 이때 아찬 여삼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여삼이 다시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그를 들어오게 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꾼 꿈과 그 해몽에 대해 자세히 말하니 여삼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다시 해몽을 해 볼까 합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여삼에게 해몽하기를 청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윗자리에 오를 수가 있단 말이오?” “은밀하게 북천 신에게 제사 지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이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김주원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끝에 왕의 친족 조카뻘 되는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런데 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서 주원은 물을 건너오지 못했다. 어느 사람이 말했다.
“인군이 대위에 오르는 것은 진실로 사람의 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지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 왕의 아우로서 평소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가 있습니다”
이에 뭇사람들의 의견이 합치되어 그를 세워서 왕위를 잇게 했는데, 조금 후에 비가 그쳤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 김경신의 꿈 이야기가 없지만 첫 번째로 유력한 왕위계승자가 김주원인데 그를 제치고 김경신이 왕위에 오른 이유를 역시 홍수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