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석불좌상은 영지(影池)에서 북동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소나무 숲속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와 같이 아사달이 아사녀를 애타게 그리며 조성한 불상이라면 영지 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헤르만 헤세가 아내 니온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당신은 신비로운 마술사와 같아요. 나는 다시 열네 살 짜리 어린 소녀가 되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애인이자 보호자, 남편이며 하나의 기적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준 기적이지요” 니온은 시력이 나빠 책을 읽을 수 없는 남편에게 1500여 권의 책을 읽어 준 헌신적이고 다정한 반려자였다. 부여로부터 머나먼 서라벌까지 남편을 찾아온 아사녀의 이야기에서 니온의 사랑을 느껴본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없음은 물론 이 불상을 봉안한 사찰 이름과 창건과 폐사 시기 등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불상 주변으로 옛 기왓조각이 흩어져 있고 초석 등이 일부 눈에 띄고 있어 이 석불을 모신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불상 바로 옆에 영지암이라고 하는 여염집 형태의 사설 암자가 있다. 이 불상은 불국사 석가탑을 건립할 당시 아사달을 찾아온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리다 영지에 몸을 던져 죽은 후 아사달이 그녀를 위해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광배와 대좌를 완전히 갖추었으나 불상과 광배 부분의 조각이 명확하지가 않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마멸이 아니고 원래 미완성의 불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조각을 하다가 암석의 석질에 문제가 있어 조성 도중에 그만두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불상은 광배와 불상을 한 개의 돌로 조각하고 대좌는 상 · 중 · 하대를 각각의 돌로 만들었다. 이는 암석을 옮겨와 불상을 조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측 광배와 얼굴, 우측 무릎, 상대 대좌의 후면을 비롯하여 여러 부분이 깨어지고 풍화로 심하게 마모되었다. 또 석질이 굵은 입자로 되어 있어 조성 당시 세부적인 표현에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타원형의 얼굴은 마멸되었거나 혹은 조성 당시 문제로 이목구비가 선명하지 못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육계는 둥글게 표현되어 머리와 분명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뒷부분에서 나발의 흔적이 보이나 파손이 심하여 전체적으로 불분명하다. 불의(佛衣)는 편단우견으로 얇은 천이 신체에 밀착되어 있고, 옷 주름은 오른쪽 가슴과 왼팔 위에서 몇 가닥의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발목 쪽 옷 주름선이 V자형으로 발목이 많이 노출되어 있는 편이다. 두 다리 사이에는 원래 부채꼴 모양의 옷 주름선이 있었겠지만 마모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인데 오른손의 검지가 살짝 들려 있다. 두 발은 모두 불의 밖으로 노출되어 있고 왼발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짓고 있는 오른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배 모양의 광배는 불상과 한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 거신 광배 안에는 두광과 신광이 두 줄기 융기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선 위에는 장식문양이 없다. 구획된 융기선의 안으로는 당초문, 바깥으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두광의 윗부분에는 구름 위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삼존의 화불이 있고 두광과 신광이 만나는 접점 위로는 좌우 대칭으로 각 1구씩의 화불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확인이 어렵다. 광배 뒷면에는 조각의 흔적이 없다, 대좌는 상·중·하대를 모두 갖춘 연화대좌인데, 상대석 뒷부분이 약간 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남아있다. 원형으로 된 상대석에는 16개의 겹연꽃무늬가 2단으로 조각되어 있고 각 꽃잎 안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로는 2단의 8각 몰딩이 있다. 상대석 아래로는 8각 중대석이 별도의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위쪽이 약간 좁아진 형태로 모서리마다 우주를 조각하고 안상이 음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안에 조각은 없다. 하대석 역시 별도의 돌로, 팔각인데 얕은 부조로 24개의 쌍잎 연꽃무늬를 복련(覆蓮)으로 새겼다. 하대석 윗부분에는 4단 8각의 층단 받침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 쌍잎 연꽃무늬 아래에는 8각의 기대가 있고 기대의 각면에는 꽃무늬가 있다. 하대석 아래에 지대석은 보이지 않는다. 적절한 신체 비례, 안정되고 당당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다소 부피감이 줄어든 가슴과 가늘어진 허리, 중대석이 길어지면서 전체적으로 높아진 대좌, 하대석 상부 4단 층단 받침 등으로 미루어 조성 시기는 8세기 중엽 경보다 다소 늦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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