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적석천(水滴石穿)’, 과연 물방울이 돌을 뚫었다. 해겸 김해익(65) 선생의 고려청자 재현이라는 한 가지 신념을 향한 일평생의 집념과 사명감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5대째 도예 명가의 맥을 잇고 있는 선생은 17세 때부터 물레를 돌리며 50년 동안 목표를 이루려는 일관된 집념 하나로 필생토록 고려청자 비색 재현에 매진하며 첨단 문명의 시대에 미련토록 고행의 길을 기꺼이 자처하는 이다. 8시간이면 청자를 구워내는 시대다. 편리한 전기와 가스 가마 덕이다. 그러나 장작가마에서 구운 청자는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선생의 통가마 방식은 청자 소성의 필수 과정으로, 여기서 얻어내는 비색은 고려청자만의 오묘한 비색 그 자체다. 우리민족문화의 최고의 정수이자 위대한 유산이면서 그 제조법에 대해선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비색을 되살리고있는 선생은 인터뷰 내내 시종 ‘불’ 이야기를 했다. 또 50여 년간 신라토기나 백자, 분청사기, 청화백자 등의 연구를 통해 청자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선생은 일본, 중국 등 어디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비색의 고려청자를 재현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이 성공은 국가나 사회적 지원 없이 장인의 땀과 혼만으로 이뤄낸 결과여서 더욱 값지다. 너무 많은 재능 때문에 신이 질투하는 걸까. 이 도공에게는 아직 무형문화재라는 타이틀이 없다. 문화재 지정이 시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시종 불에 대한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던 선생은 청자에 관해선 청산유수, 달변가였다. 가업을 이은 50년의 경험 없이는 표현되지 않을 확신에 찬 언어였다. 청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선생은 예술가들이 취하는 최소한의 자기 연출도 없다. 집념과 열정은 선생을 더욱 강직한 도공으로 단련시켰으리라. 청자를 빚던 어느 도공의 못다 한 꿈일까. 청자 재현이라는 숙명적인 업보를 어깨에 짊어진 듯 선생의 눈빛은 치열한 불꽃을 닮았다. 그 옛날 19세기를 살고 있는 듯한 도공의 이미지는 순일한 경지에 올랐고 자긍심이 넘쳤다. 그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비색의 근원은 ‘불’이라는 신념하나로 고려청자 비색 재현을 위해 두문불출하고 평생을 바쳐 온 이다. 유일하게 고려청자를 재현한 이가 경주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런 일인가. -“사람들은 참 미련하다,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무형문화재 지정 시급해 선생을 유행어로 비유하자면 ‘찐’이고 ‘진또배기’다. 그는 불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도예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데 바로 1300도로 고려청자의 신비를 되살렸다. 그 푸른빛이 장작가마 1300도 이글거리는 홍염 너머 있다는 믿음을 품은 지 50년 이라고 한다. “그 세월 동안 지극하도록 불을 땠습니다. 1년 365일 절반을 밤낮없이 통장작불을 땠지요. 수비(水飛, 흙을 물에 넣고 휘저어 잡물을 없애는 것)에서 요출(窯出, 가마에서 구운 도자기를 꺼내는 일)까지는 석달 넘는 일이라 1년 꼬박 가마불은 서너 번입니다. 사람들은 참 미련하다,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선생의 100여 년 된 오랜 창고 안 물레 작업장에선 누대에 걸친 작업 도구들과 도공의 정신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또 ‘50년을 연구해 쳐박아놓은’ 창고안에는 작업의 변천과 실패를 자료로 여기고 모아둔 작품들은 쌓여져 있거나 대충 포개둔 채였다. 그간의 수많은 청자 작품들을 전시할 전시장도 절실해 보이는 대목이다. 마치 보물선 한 척을 만난듯했다. “여기 있는 이 전부가 다 마음에 들어요. 하나하나 과정에서 조금씩의 기술이 축적된 게 보이잖아요. 그간의 청자 작업들을 남겨 두었기 때문에 비색에 대한 정리가 되었거든요”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청자는 초고화도 환원소성, “1300도 고화도환원 소성법 터득한 지금은 21일 동안 밤낮으로 불을 때고 21일 식혀 가마를 엽니다” “특히 청자는 초고화도 환원입니다. 1300도 살아있는 불꽃 속에서 환원을 이뤄야했고 ‘불로써 불을 막아야’만 고화도 환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밤낮 없이 보름 이상의 불때기로 가마가 최고 화도에 이르면 진흙으로 가마를 밀봉해 불 땐 기간만큼 식히는 인내의 과정을 거칩니다. 저만의 고화도환원 소성법을 터득한 지금은 21일 동안 밤낮으로 불을 때고 21일 식혀 가마를 엽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가마불을 때는 것은 아직도 선생의 유일한 기록이다. -5대째 도예 명가 이어...간판 없애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청자재현에 더욱 박차 건천읍 단석로에 위치한 선생의 작업장은 ‘해겸요’다. 그는 1대 김완배 선생에 이어 5대 송선요(현 해겸요) 도공이 된다. 예전 송선리에는 가마군이 있었다고 하는데 부친(4대 김재환 선생)의 가마에는 1970년대 후반 가세가 기울기 전까지 5~6명 정도는 늘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건천읍 송선리 산내가는 길 초입, 느닷없는 곳에서 작업장을 만난다. 선생의 작업장엔 그 흔한 간판 하나도 없다. 10년째 도자기를 팔지 않는 선생은 고액 거래에의 유혹도 떨쳤다. 청자 재현을 위한 연구에만 매진하다보니 팔 물건을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하하.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발전이 있지요” 십 수 년간은 전혀 팔지 않아 고생길을 알면서도 고생을 자처했다. “‘해겸요’라는 간판이 있으니 장사한다고 주문도 하고 구입하러 찾아왔어요. 파는 게 급한 것이 아니라 속히 결과물을 내놔야 하는데 장사를 하면 청자구현은 제자리일 수밖에 없었지요. 간판을 없애버린 이유입니다. 내 돈 자꾸 들고 곳간은 비어가는데도 선택한 이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어요” 각종 매스컴에서 내버려두질 않았는데 사람들에 휘둘리다 보니 작업에 전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10년간 더욱 두문불출하며 청자재현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기능은 숙지만 되면 늘어요. 내가 전해줄 가장 중요한 것은 불기술입니다” “서로 윈윈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선생은 최근 5년간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많은 색을 경험해봐야했고 그 과정을 통해 정확한 비색을 뽑아내야했다. 불때는 방법도 바꿔봤다. 그 미세한 간격을 불을 때면서 맞춰야한다. 직접 불을 때면서 그 변화를 보지 않으면 후학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한다. “바닷물에 천년을 넣어놔도 변치 않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그 원천 기술을 제대로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최고가 되잖아요? 다른 나라가 흉내를 못내는 거지요. 그래서 술, 담배까지도 끊었죠. 건강해야 후진도 가르치고...,” “쉼없이 달려오다 생애 처음으로 지난해 1년을 꼬박 쉬어보았다는 그는 “청자는 우리나라 귀중한 문화유산이잖아요. 외국을 이길 수 있는 도자 기술을 우리가 보유해야 잖습니까. 그 기술을 이제는 거의 터득했는데 아직도 인정에는 인색해요. 지난해 그 최종 기술의 정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청자에는 여러 색이 있습니다. 여러 색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알아야하지요. 청자의 비취색, 갈색, 누런색, 녹색 등이 어떻게하면 나오는지 알아야하는데 그것은 불에서 나옵니다. 불 중 에서도 산소의 잔량으로 색이 바뀐다는 것을 이제는 터득한 것이지요. 청자 재현에 부족한 흙은 점토, 고령토, 백토 등 세 가지를 적절하게 사용하면 청자 흙이 만들어지고 유약은 장석, 규석, 카올린, 석회석, 재, 산화철 등을 적절하게 여러 번 분배를 해서 넣으면 맞아떨어진답니다. 하지만 불은 몰라요. 불은 아주 사나워. 불을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불은 사나워져요. 그 불을 다루기까지 50년 걸린거요”   “요즘 사람들은 가마 안을 보면서 불을 때요. 저는 완전히 열흘 이상 가마 안을 보지 않고 굴뚝만보고 불 색깔의 변화와 불 올라가는 속도만 보고 땝니다. 어려워요 이거. 푸른빛이 올라오는 순간이 비색 만드는 불입니다. 이 불을 도자기에 침투시키는 거죠. 바로 비색이 나오는 순간이지요. 이 불이 관건인데 진공에서 50센티 이상의 숯을 태울 때 50센티 이하에서는 타질 않는데 그걸 태워야 푸른빛이 많이 나오고 이는 공기가 안들어가는 상태에서 태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축열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고 이제는 그 축열하는 방법을 터득한 거죠. 그래야 변치 않는 청자를 구현할 수 있고요. 도자기 장사를 하지 않은 지난 10년간 아마도 수 억원 정도는 투자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데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간 굴뚝에서 내뿜는 불색깔의 변화를 기록하고 연구하며 드디어 청자비색의 열쇠인 푸른 빛깔의 불색을 창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로 윈윈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가마 만들고 흙 찾고 유약 만들고 물레성형하고 조각(상감)해야하고 이 한 작품을 하기까지 분야가 너무 많아요. 제가 다 잘하기는 너무 벅찬 감이 있지요. 지금까지는 이 모든 과정을 저 혼자 다해냈지만 다 잘해 낼 수가 없잖아요?”며 협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기술을 혼자 독식해서 가업으로 물려줄 생각보다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 모든 것을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청자의 온전한 재현을 위해 청자고유의 비법을 찾고 계승하고 재현해서 물려줄 것입니다. 굳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싶은 이유는 공적인 근거로 후진에게 신뢰를 주는 바탕아래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청자 불기술의 완성자... “머물지 않고 청자를 제대로 구현해 부활 시켜야죠” “초벌에 유약 바르기까지 10일, 22일 불때고 22일 식히니 44일이고 열흘이 더해지니 불때기 시작해 54일 만에 요출됩니다” “누런 빛이 감도는 청자를 아시나요? 그 색을 만들지 못하면 제대로 된 청자재현이 아닙니다”선생은 이미 노르스름한 비색을 재현해놓고서도 실패한 비색인줄 알고 좌절했었다고 한다. 이제야 보니 그 색이 나와야 청자 비색이라는 걸 알았다고. 자꾸만 부족하다는 생각에 달려갈 앞길만 보였다고. “50여 년간 비색을 추구하다가 이제는 원하는 비색을 얻기까지는 한 두 번이면 가능한 경지에 오른 것 같습니다. 21일간 불을 때도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버립니다. 지독하게 고된 작업이죠. 작품들 하나하나가 자식 같지요. 다 굽고 나면 진이 빠져버립니다. 불때기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자다가도 밥먹을때도 벌떡 일어나 불 때러 가는 식이죠(웃음)” “이 작업에 대해 이야기와 공감과 고충을 나눌수 있는 대화 상대가 없습니다. 정말 외롭지요. 이 작업은 저 밖에 고민할 수가 없으니까요. ‘사오정’ 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왜냐면,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는 중에도 머릿속에는 계속 가마속 불만 때고 앉아있는 거죠. 하하. 일년에 불 때는 건 서너 번인데 한 번 불을 때기 위해 머릿속에는 수 천 번 굽고 난 뒤 불을 땝니다. 그래도 그 답을 찾기 쉽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는 불에 대한 확신이 섰으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거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터득한 경지다. “비색을 만들 수 있는 비법을 성공한 것에 도취돼 머물지 않겠다는 생각은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청자를 제대로 구현해 부활 시켜야죠. 변질되지 않는 기술로 만들어 국외에서도 당당히 경쟁해야 합니다. 그 기술을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후진 양성도 해야 하고요. 갈 길이 아직 멉니다” -“실패의 연속에서도 아주 더디게 발전은 쌓여갔습니다” 지속적인 실패가 거듭되었다. 선생의 오늘은 수없는 실패가 축적된 결과다. “실패는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패를 통해 계속 연구하게 되고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실패의 연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이었지만 아주 더디게 발전은 쌓여갔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다렸지요. 조급하게 진행해도 빨리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50대 중반까지만 해보자고 결심했으나 연구가 단편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한 분이 청자 비색에 대한 지적을 했고 자극받아 더욱 청자의 완성에 다가서기 위해 매진하게 됐던 거죠. 그때는 평생을 걸어도 비색을 완성할 수 없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비색 만들기 전까진 청자 재현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실패라고 여겼던 것이 결국 기술의 축적이 되었고 그 시간은 10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불기술을 사용해 청자가 내지 않아야 할 색을 배제 시킬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고 불 때는 날이 일주일 이상 늘어나면서 유약의 퍼짐과 흐름을 다잡고 색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됐지요. 전체를 아우를 수 있으니까요” -“정작 경주 사람들이 저를 몰라봐요. 저는 경주 사람 아입니까” “경주에서 날 좀 알아봐주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큰 바람이라면, 전통 청자 도자기에 한해서는 반드시 족적을 남기고 싶습니다”라며 탄식하듯 말하는 선생은 천진할만큼 솔직담백하다. ‘쫄딱 망하니 청자 하지 마라’고 한 이도 많았다. 청자 주요생산지인 강진에 가서 가마까지 만들어주고 왔는데 불까지 가르쳐달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현재 30~40 곳에서 청자를 구워내고 있는데 불을 때서 만드는 이가 없다며 그곳에서의 동참유혹도 있었으나 “저는 경주 사람 아입니까”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제가 낸 청자에서 청자 가마불이 함께 보인다면 보람으로 여기겠습니다” 각지에서 발견된 청자 파편을 수집해 그 조각조각을 연구해 비색을 만들 수 있는 비법을 찾아낸 도공. 소박한 바람을 거칠게 전달하는 사람. 그의 언어에는 번지르한 장식이 없다. 치열한 경험에서 비롯된 실용과 합리만 있을 뿐이다. 선생의 생생한 경험담은 종종 강연에서 다른 이들이 차용하기도 할 정도라고 한다. 진정한 고수는 말이 없을진대. “고화도 환원 소성을 거쳐야 진정한 청자라는 믿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5대 가업을 이은 도공으로서 물려받은 것은 ‘불이 9할’이라는 훈육과 가마불과 씨름하던 아버지의 ‘불대장’입니다. 고려청자의 나라에서 정작 장작가마불이 사라지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달래며 이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이 길을 걸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낸 청자에서 청자 가마불이 함께 보인다면 보람으로 여기겠습니다. 스무 하루를 넘긴 불의 결을 느낄 수 있다면 큰 기쁨이겠습니다” 피와 땀의 나날이었으리라. 선생의 고된 작업은 제대로 인정받아야 한다. 선생이 경주 건천에 살며 청자 재현 작업에 정진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겐 큰 축복이 -김해익 선생은 한국중요무형문화재기능협회 소속, 2009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협회 표창장, 2017년 도자기부문 경상북도 최고장인, 2016년 비취색 고려청자 제조방법 발명으로 특허원에 등록, 한국을 빛낸 사람들 전통 도자기 연구 공로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8년 고려청자재현작품전(경상북도청), 2017년 해겸 김해익 고려청자 재현 청송전, 2013년 KBS1 TV 공감 다큐 방영, 2012년 고려청자재현전(KBS 대구방송총국 제1전시실), 현재 이 달 말까지는 경북도청에서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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