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AC(After Corona19), BC(Before Corona19)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Corona19는 이렇게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전 세계를 변화 시키고 있다. 많은 매스컴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에 인간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까지 표현한다.
전 세계는 전염병 하나로 엄청난 파장을 미치고 있다. 경제를 위시한 인간의 모든 삶과 연관지어진 분야분야에 앞날이 어떻게 될지를 짐작하기조차 두렵고 또 어렵게 된 작금의 상황이다. 앞으로의 변화를 각 분야의 학자들이 서로 앞 다투어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은 지금까지의 변화나 대처 등으론 상상조차 어려울 것이다. 예전엔 엄청난 질병이었던 홍역이나 콜레라 같은 일상 속의 전염병으로 진행 되면서 백신도 치료제도 곧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대처 하지 못하는 혹은 잘 정리하는 사람으로 쉽게 구분 지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그냥 일상의 여느 병처럼 그냥 지나가는 전염병정도로 치부하게 될, 조금은 무디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다. 다만 평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살아가야하는 사람이 조금은 많아질 상태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Corona19를 맞닥뜨린 이즈음 한 문화인으로서의 우려는 또 다른 앞날의 변화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Corona19를 통한 메시지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가장 우려 하는 것은 불신풍조 속에 사람과 사람간의 ‘단절’이라고 감히 정리하고 싶다. 기침하는, 재채기하는, 열이 나는, 또 늙은 등등이 본인을 공격할 것 같은 사람들로 주위에 있는 모두가 적군과 다름이 없는 전쟁 같은 상황이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Corona19이후 단절이 주는 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끔직하고 두려운 미래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몇 주 전 얼떨결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이른 아침 용인민속촌에서 광역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물론 그때는 운전기사가 마스크 미착용에 대한 경고를 하던 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버스 안은 싸늘했다. 마치 병 보따리를 안고 타는 사람을 보듯 모든 승객들은 고개를 돌리고 옆자리에 앉기를 꺼려했다. 다시 내려서 마스크를 가지러 가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어서 실례를 무릎 쓰고 건장한 청년 옆자리에 앉았다. 순간 청년은 통로 쪽으로 빠르게 몸을 돌렸고 1시간 동안을 송충이를 대하 듯하며 쿵쿵댔다. 나 역시 그의 불편함을 인정하는 바라 창 쪽으로 몸을 틀어 햇볕을 온 얼굴로 막으며 그 시간을 버텼다. 간혹 나오는 불규칙한 마른기침은 버스 안 모든 이들의 불안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미 버스는 고속도로위를 달리고 있었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버스는 강남역(신논현역)정류장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정류소 앞 약국을 향했다. 순간 당황했다. 미닫이 문 창에 부착된 ‘마스크 미착용자 입장 불가’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의 실례를 무릎 쓰고 뻔뻔스럽게 입장 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약사가 두 팔을 들어 흔들며 동냥 나온 거지를 내쫓아내듯 기겁을 하며 나가라는 것이다. 황당했다. 문밖으로 밀려난 나는 본의 아니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고 급기야는 하소연을 늘어놓는 상황으로 까지 가고 말았다, 잠시 후 뒤로 멀찌감치 물러선 그 여자 약사는 주민등록증을 요청했다. 마침 그날따라 공용마스크는 구매할 수가 없는 날이란다. 그러니 3장에 4500원짜리 마스크를 구입하라는 것이다. 그 상황은 너무나 답답했지만 결과는 정말이지 감지덕지다.
이런 상황이 여기저기에서 어디 이것뿐이겠냐? 울며 겨자 먹기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교과서 속의 진실만을 과연 이해하겠는가? 이어져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불신’과 ‘단절’에 배려니, 양보니, 공동체니 하는 단어가 그들에게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것인가? 한여름에 마스크를 쓰고 현관을 들어서는 늙은 아버지, 어머니의 이마에 체온계를 들이대고 몸에 소독약을 뿌리곤 “죄송해요. 됐어요. 올라오세요!”하는 며느리를 어떻게 탓하랴? 이미 이 나이만큼 살아온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겠지만 사회를 알지도, 배우지도 못하고 ‘불신’과 ‘단절’만을 배우고 있는 어린 아이들은 어떻게 느끼며 살아갈까?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지금의 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