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板書)                                                          유홍준 저것은 죽음의 글씨저것은 죽음의 문장어떤 손은매일매일 저곳에 하얀 글씨들을 가득 채우지 않으면 죽는다 어떤 손은 평생 저곳에 하얀 글씨들을 채워야지만 산다분필로 쓴 글씨는씨방이 없는 글씨아이 하나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고 지우개를 턴다 하얀 글씨였던 것들이 폴폴폴폴 먼지가 되어 날아간다어느 한 곳에 글씨를 가득 채운다는 건 공포,하얀 글씨를 받아쓰는 아이들은 모두 머리가 이상해진다하얀 글씨를 받아쓰지 않는 아이들은 맞아 죽는다 -불모의 사회와 시에 대한 직관의 ‘눈’다양함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맹목적인 목소리가 지배하는 사회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풋것의 싱그러움이나 생명이 깃들지 않는다. 시인은 칠판에서 판서(板書)하는 장면에서 우리 사회를 직관하는 성찰과 매서운 비판을 보여준다. 시인은 서정적인 문장을 구사하지 않고 “저것은 죽음의 글씨”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선언적 어조의 진술 문장을 구사한다. 시적 화자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칠판에 “매일매일 하얀 글씨들을 가득 채우지 않으면 죽는다” 생각하고, 평생을 그렇게 사는 ‘손들’ 투성이다. 관성과 타성의 그물에 갇힌 사람들은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그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 죽음이라는 걸 잊어버린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필로 쓴 글씨는/씨방이 없는 글씨”다. 그것은 생명을 낳지 못한다. 그 하연 글씨들은 “폴폴폴폴 먼지가 되어 날아간다” 심지어 “어느 한 곳에 글씨를 가득 채운다는 건 공포”라고까지 한다. 시인은 왜 그렇게 썼을까? 그것은 주입식 교육일 수도 있고, 개성을 살리지 못하는 시대의 환경일 수도 있고, 생명을 낳지 못하는 문학행위일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은 “하얀 글씨를 받아쓰는 아이들은 모두 머리가 이상해”지고 “맞아 죽는다”는 문장에서도 같은 흐름으로 이어진다. ‘판서(板書)’를 ‘죽음의 글씨’, ‘죽음의 문장’이라 하는 말에는 이 사회와 문화, 특히 문학을 직관하는 매서운 통찰의 ‘눈’이 들어 있다. 판서를 하는 주체와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 객체를 다 들여다보는 그 또렷한 그 눈에서 우리는 칠판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자 문학판, 나아가 시 작품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논리를 더 축소해서 시 작품이라면 판서행위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것은 생활과는 유리된 논리와 이성만으로 가득한 창백한 지식이 되어버린 시가 아닐까? 시인은 여러 방향으로 판서라는 상징을 틀고 있지만 필자는 최종적으로는 생활과 유리된 지적인 시들은 생명력이 없음을 확증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살아 꿈틀대는 글자가 아니라 “하얀 글씨였던 것들”, “폴폴폴폴 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릴 것들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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