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여러 마을을 취재하면서 한결같이 드는 생각 하나가 있다. 경주는 참으로 방만하게 넓어서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스토리를 가지고 대를 이어 살고있는 자연부락들에서는 아직도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이 허다하다. 엄연한 21세기 경주 속 삶의 형태 중 한 양상으로서 기묘하게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호에서 소개할 선도동 ‘충효큰마을’도 이런 마을 중 하나였다.
경주시의 서쪽 외곽에 있는 선도동 ‘충효큰마을’은 송화산 남쪽기슭 원당골에 있으며 충효동 마을의 중심으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울산 박씨 집성촌이었고 지금의 대우아파트 북쪽 골짜기에 있다(경주풍물지리지 자료). 2009년까지는 56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충효큰마을은 충효동 이안아파트와 대우아파트 등 거대한 아파트 단지 뒤에 가려져있어 대로변에서는 짐작할 수 없는 작은 마을로 충효천길과 충효5길의 두 가지 도로명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을은 크고 작은 언덕배기에 자연스레 집을 지어 평지에 지은 집들과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마을이었지만 입체감이 도드라지는 형상이었다. 충효동 도심 한복판, 대단지 아파트 단지 바로 뒤에 있으면서 선대로부터 잘 보존돼 그 지형을 잘 이용하고 살고 있는 곳이었다. 마을 여기저기선 이제 막 초여름으로 변하는 자잘한 풍경의 변화가 감지됐다.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벌써 열매를 단 빨간 딸기가 그렇고 뽕나무도 푸릇한 오디를 달고 있었다.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주민 우경숙(67) 씨는 마을 한 바퀴를 함께 돌며 마을의 이력에 대해 간단한 설명도 해 주었다. 우 씨는 결혼한 지 40년째 이 마을서 살고 있다고 했다.
-“텃밭일도 많고 산책삼아 옥녀봉도 다녀오곤 해요. 등산길이 참 좋거든요” 우 씨는 “예전에는 모두 기와집이었어요. 지금은 기와집을 개조해서 양옥 형태를 띠는 집들이 많아요. 신축한 지 얼마 안 되는 집도 있고 개축한 집도 있어요. 이 마을엔 이곳 토박이들이 많아요. 경주 유지급들도 많이 살고요(웃음). 수년전만 해도 42가구 정도에 불과했는데 최근에 새롭게 입주해오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그래도 아직 젊은 층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마을 원주민들은 결속이 좋은 편이고 인심도 후하지요. 주민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는 이들이 많아요. 충효동 인근 들판과 주변의 들판에 농사짓는 이들이 많지요”라고 했다.
파를 심어둔 텃밭을 가꾸고 있는 한 어르신을 만났다. 이 마을로 시집온 이후로 50년째 살고 있다는 어르신은 마을회관 문을 닫아 모이진 못하지만 심심할 겨를이 없다며 웃는다.
“텃밭일도 많고 산책삼아 옥녀봉도 다녀오곤 해요. 등산길이 참 좋거든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때 “형님아 배고프다”며 너스레를 뜨는 이웃주민들이 합류했다.
-수령 190년 된 당산나무와 마을표지석의 존재는 ‘충효큰마을’ 다운 면모 자랑해 마을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당산나무는 수령 190년을 자랑한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서 마을의 중심축으로 보였다. 나무둘레는 7.8m, 수고(樹高)는 17m다. 이 나무를 중심으로 작은 의자들을 두어 휴식의 공간이라 이름 지은 쉼터로 만들어두었다. 이 당산나무의 존재로 큰마을 다운 면모를 더욱 자랑할 수 있어 뵀다. 당산나무 바로 앞에는 1993년 7월에 세워진 ‘충효동 큰마을’이라는 마을표지석이 서 있어 마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충효 5길에서 만난 충효큰마을 경로회관은 경주시가 지정한 모범 경로당이다. 또 마을의 당산나무 바로 옆, 유비지역 아동센터 자원봉사거점센터 주변에선 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며 골목길 여기저기를 누빈다. 숨바꼭질하느라 담벼락 뒤에 꼭꼭 숨어있는 소녀가 귀엽다. 도심의 골목이나 시골길 어디서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본 곳은 오랜만이었다. 이 아이들 덕에 조용했던 마을엔 활기가 넘친다. 한 아이는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어 감꽃을 하나씩 빼먹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감꽃을 말려 집에 가져가서 달달해지면 나중에 먹으려구요”라고 한다. 어린 시절 감꽃을 줍던 추억들이 새삼스레 소환되었다.
-충효천길에 있는 기품있는 세도가의 재실 ‘심송재’ & 마을에서 1.8k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옥녀봉은 훌륭한 산책로 제법, 마을의 언덕빼기에 오르자 일반주택을 개조한 듯한 사찰하나도 보인다. 대한불교 조계종 ‘남화사’였다. 사찰 바로 옆에는 ‘제일건축사사무소’라는 작은 간판을 걸어놓은 집은 높은 축대를 쌓아올려 지은 집으로 숲이 에워싼 집이었다.
이 마을 전경이 그대로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마을 가장 높은 곳에는 늙은 향나무가 담 넘어 높이 서 있는 재실이 하나 있다. 충효천길에 있는 ‘심송재’다. 이 재실서 마주 바라뵈는 아파트 단지와 경주정보고등학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탁트인 전망이 한 눈에 펼쳐졌으리라. 제법 너른 마당 사이로 보이는 재실 건물의 당당한 품새는 기품있는 세도가들의 집안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재실 바로 옆에는 이 재실을 관리하는 관리사동이 하나 있었다. 아직도 관리사가 거주하면서 재실을 관리한다고 했다. 재실 바로 앞 작은 연못엔 부들로 꽉 차 있었다. 이 연못은 한때 뭇 과객들의 눈요깃거리로 사랑 받았을 듯하다.
재실 뒤로는 지척에 옥녀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 있었다. 마을 정상부에서 200m 정도 걸어가면 새로 지은 전원주택들이 몇 채 보이고 그 뒤편에 ‘경주국립공원 화랑지구’라는 안내판을 경계로 양 갈래의 등산로가 나타난다. 마을에서 1.8k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옥녀봉을 오를 수 있는 길인 것. 30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운동하기에 최적의 코스인 셈이다. 등산을 좋아하거나 건강을 생각하는 이들은 자주 오르는 산으로 멀리 큰 산을 가지 않으면 이곳 등산로를 이용한다.
-옛부터 내려오던 최고(最古)의 우물 있는 집...현재와 과거 삶의 형태가 묘하게 공존해 이 마을 끝자락 충효5길 골목에서 대형 아파트와 바로 인접해있는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띈다. 이 집은 바로 뒷산을 끼고 있는 형상이었다. ‘대현개발㈜(대표 김상운, 53)’ 사무실과 한옥의 가정집이 나란히 한 마당에 지어진 특이한 형식의 집이었는데 20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왔다는 주인은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다.
원래 이 집은 본채와 아래채로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개량된 기와를 이고 있는 50여 년 된 일자형 한옥 바로 옆에 최신 트렌드의 양식으로 지은 2층 양옥이 나란히 지어진 집이었다. 양옥의 1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2층은 원룸으로 대여하고 있다 했다. 특히 주인이 기거하는 한옥에서는 화목보일러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장작을 쌓아두고 있어 도심 안 시골집 같았다.
김 씨는 “겨울엔 방이 뜨끈뜨끈해요. 도심에서는 이런 보일러를 사용할 수 없죠. 이 마을에서 사는 즐거움 중 하나예요. 옛 방식으로 장작을 때서 난방 할 수 있으니까요. 이전에는 황성동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를 모시고 이 마을에 정착한 지가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라고 한다.
마당 입구에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이 동네서 옛부터 내려오던 최고(最古)의 우물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우물물을 마시고 빨래도 하던 곳이라고.
“20여 년 전 기계로 150m 깊이로 천공해서 물을 길어 올려 감자와 미나리 등이 심겨진 텃밭에 물을 공급하고 있죠” 우물속 두레박을 끌어 올려봤다. 차고 맑은 물은 어릴 적 외가에서 길어 올려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이 집 바로 뒷집은 이 마을서 제일 큰 부잣집이었고 선비 집안이었다고 했다. “한양에 과거보러가던 과객들도 이 집에 들러 유숙하고 갔다고들 했어요” 김 씨의 말이다. 김 씨의 집은 현재와 과거의 삶의 형태가 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옥녀봉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 아늑하고 편안했던 충효큰마을. 작은 텃밭들을 지척에 두고 소소하게 농사짓는 일상을 누리는 소박한 마을의 전형이었다. 느긋한 삶의 터에서 큰 욕심없이 사는 이들의 땅이었다. 대낮인데도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하고 인접한 산에서는 산새들과 뻐꾸기가 쉴새없이 구애를 해대는 이 마을은 팍팍한 도심속 완충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