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전집(星湖全集)』제7권,「해동악부(海東樂府)·도솔가 신라(兜率歌 新羅)」를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재위24~57) 5년(28) 겨울 11월에 임금이 나라 안을 순행(巡行)하다가, 굶주리고 얼어 거의 죽게 된 한 노파를 보고는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를 이 지경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하고, 옷을 벗어 그 노파를 덮어 주고 음식을 주어 먹게 하였다. 이어 곧바로 담당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서, 각 지역마다 환과고독(鰥寡孤獨)과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찾아가서 위문하고 물자를 공급해 주게 하였다. 이에 이웃 나라의 백성 가운데 그 소문을 듣고 신라로 들어온 자들이 많았고, 이 해에 백성들이 즐겁고 편안하여, 비로소 〈도솔가〉를 지었으니,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라며 「도솔가」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외에도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제33권,「외편, 동사(東事) 신라세가(新羅世家) 상」 그리고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하 그리고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제12권,「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신라악」 등에서 왕의 어진 정치를 예찬하는 신라음악 「도솔가」를 언급하였다. 이후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742~765) 때 월명스님의 「도솔가」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676년부터 935년까지 통일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시기로, 경덕왕은 새로운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왕실 전제왕권의 재강화를 위한 일련의 관제정비와 최고 행정 관청이자 왕정의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執事部)를 중시하는 개혁조치를 취하고, 불국사·석굴암·성덕대왕신종 등 건립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로 국권회복과 왕권확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경덕왕 즉위 19년(760) 4월 1일에 갑자기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르더니 열흘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고, 때아닌 변고에 나라 안은 발칵 뒤집혀 경덕왕은 걱정이 높아만 간다. 이때 운명처럼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 월명스님이 등장하면서 향가를 불러 나라의 변고를 잠재운다. 『삼국유사』 제5권, 「월명사 도솔가(月明師 兜率歌)」조에 등장한 기이한 이야기로, 당시 신라인들은 향가를 숭상한 지 오래되었고, 월명스님이 향가를 잘 불렀으며, 천지와 귀신을 여러 번 감동시켰다고 전한다. 월명스님의 「도솔가」는 불교음악과 향가에 대한 연구에 자주 언급되지만, 정작 향가에 대한 번역과 음악 원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향가 연구 가운데 도솔가에 관한 학위논문 김상락,「향가의 구성 요소 분석과 주술적 의미맥락 연구. 혜성가·도솔가·처용가를 대상으로」,『동국대학교』, 2013, 국내석사 외 다수 그리고 김기종,「도솔가 불국토의 선언」,『한국시가연구』38, 2015. 외 학술연구 수십여편 이상이 발표되었지만, 불교음악과 배경의미 그리고 시가 비교연구에 국한되며, 시대의 괴리감과 자료의 소략으로 월명에 관한 인물고 그리고 적확한 의미분석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거의 힘든 실정이다. 부산대 윤소희선생은 2015년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국악원논문집』통권 31호에서 월명스님이 부르지 못했던 ‘성범’의 실체를 찾아서 실크로드와 중국 그리고 한국의 초전불교의 면면을 추적하였고, 그 결과 중국 초기불교 시기에 서역에서 온 유랑승들이 많았고, 이들은 범어범패(梵語梵唄)로 신통력을 부리거나, 다라니(陀羅尼)나 진언(眞言)이 지닌 의성어·의태어의 유희성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사실을 포착하였다. 유리왕 대 「도솔가」 가사는 전하지 않지만, 조선에 이르러 많은 문사에 의해 재창작되었고, 귤산 이유원은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다음과 같이 「도솔가」를 읊조렸다. 구휼의 인자한 마음 이웃나라 감화시키니 (賑賙仁化感交隣)먼 곳의 백성들까지 이고 지고 돌아오네 (携負歸來無遠民)태평을 기원하는 풍속에 이 곡을 노래하니 (國俗歡康歌此曲)소리마다 음률 맞아 비로소 신명이 통하네 (聲聲𠯴律始通神) 해동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물을 소재로 사용한 악부를 말한다. 악부는 중국 한나라 때에 각 지역의 음악을 채집하여 정리하는 관서(官署) 명칭으로, 훗날 채집된 음악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고, 시대가 흐르면서 악곡(樂曲)은 분리되고 가사(歌詞)만 남아 시(詩)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문사들은 성덕을 베푼 유리왕의 어진 정치가 조선에도 행해지길 바라며 시를 지었을 것이다. 바로 정치는 민심을 어루만지고 어려움에 처한 이가 없도록 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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