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봉쇄’를 기억하는가? 독일군의 포위망으로 러시아의 레닌그라드가 고립무원의 위기에 처했지만,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홀에서 연주된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에 용기를 얻은 시민들이 강력한 유대감으로 872일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사회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 예술은 구성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제시해야 하다는 사명으로 지역 예술의 올바른 위상과 확립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재)경주문화재단의 오기현 대표. 임기 1년이 되는 기점에서 그를 만나 경주문화재단의 비전과 향후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듣는다.#한 해 경주문화재단을 이끌어온 소감 경주에 와서 예상외로 실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국사 석굴암 외에는 별로 볼 것이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경주의 유적이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처럼 스케일이 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천년 수도의 위용은 단지 스케일로만 나타나지 않죠. 경주의 유적은 땅 위보다는 땅속에 감춰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년을 이어온 조상의 숨결이 지층 켠켠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경주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숨겨진 숨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경주시민의 문화적 역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매일, 이전에는 몰랐던 경주의 문화적 역량을 새로 발견하고 있습니다. 공연장에서 관객의 수준은 박수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공연내용을 완벽히 이해해야 비로소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서 박수를 칠 수 있거든요. 클래식 공연을 하러 왔던 예술인들도 종종 경주시민의 수준에 감탄합니다. 경주 문화재단 대표로서 관객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문화재단 직원들에 관한 처우입니다. 사실 20명의 빠듯한 인원으로 공연·전시·교육·대관사업, 경주시 공기관 대행 사업, 그리고 최근에는 한수원 문화후원사업까지 시민들의 문화 향유 증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마 10년 전과 비교해보면 사업 질과 양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아실 겁니다. 하지만 최근 3년간 정직원 20명 中 5명이 안타깝게도 처우 문제로 퇴사했고 인근 도시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전문성과 노하우가 고스란히 유출된 겁니다. 경주문화재단의 경쟁력은 지역 예술인과 관객 그리고 문화재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합심해 노력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재단 직원들의 열정과 순수함이 가려지지 않도록 처우개선을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취임 이후 대표님의 활동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스스로 평가라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경주문화재단의 가장 큰 목표는 경주시민의 문화적 품격을 높이는 일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런 부분은 이미 달성돼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제가 일하기가 상당히 수월합니다. 경제학에 ‘세이의 법칙’ 즉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10년 전 경주문화재단과 경주예술의전당이 출범하면서 경주시민들이 다양한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고, 그 성과가 지금 나타난다고 봅니다.
경주의 가장 큰 자산은 ‘문화 예술적 자산’입니다. 그 바탕에 물론 신라 천 년의 문화유적이 있습니다만, 경주지역예술인들의 존재도 매우 중요합니다. 경주예술인들의 활동이 왕성해야 신라의 문화도 빛을 발하고, 경주예술인들이 자존감을 가져야 신라 문화도 품격이 올라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역예술인들과 상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역예술인 지원사업을 통해서 시각예술, 공연예술 부문의 신진작가와 예술가들이 활동할 공간을 넓혀보려고 했습니다만, 아직은 많이 미흡하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어떤 조직도 10년 정도 지나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설과 장비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경주예술의전당은 설립 당시 전국 4대 공연장에 든다고 할 정도로 시설이 우수합니다. 상하, 좌우 이동이 가능한 무대 시설, 1000명이 넘는 객석을 갖춘 공연장, 2억원이 넘는 최고급 피아노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비의 노후화로 인해서 손 볼 곳이 많습니다. 공연 중 기능이 정지되거나 오작동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재 개보수 관련 자료를 준비하고 변호사 자문의견을 운영사에 송부했습니다. 경주예술의전당은 BTL사업의 특성 때문에 관리권이 운영사, 경주시, 경주문화재단으로 3원화돼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동성 있게 시설개선을 해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드웨어 부문의 성과는 아직은 낙제점이라고 인정합니다.
조직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재정자립도를 높여야 되고 경주문화재단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맞춰서 중단기 경영수지 개선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정부의 예산편성지침에 따라서 위탁사업 대행수수료 책정, 대관료 합리화, 네이밍스폰서쉽 유치 등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부분적이지만 독립경영을 위한 재정자립도를 높여나가겠습니다.
참고로 재단의 연간 인건비가 9억원정도 소요됩니다. 최소한 직원 인건비만큼은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직정비와 규정 개선도 다양하게 진행 중입니다. 경주시 출연기관 최초로 절대평가와 다단계평가를 도입한 자체 평정 규칙 제정했고 직원 사기 증진을 위한 자체 포상 규칙 제정, 인사권 독립, 유연근무제를 도입해서 인사조직관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고자 노력했습니다.
#BTL 사업으로 인한 불편사항이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경주문화재단은 수년간 ‘돈먹는 하마’라는 비판을 들어왔습니다. 사실 경주예술의전당을 BTL(Build Transfer Lease) 방식으로 건립하면서, 재단 회계와는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경주예술의전당에 대한 소유권과 운영권은 경주문화재단에 없습니다. 경주문화재단도 시설이용자에 불과하며, 회의실 사용을 위해서도 운영회사에 공문을 보내야 하는 실정입니다. 시설이나 공간을 활용한 수익 창출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저희에게는 언감생심입니다. 건물의 소유권은 경주시에, 운영권은 운영회사 GSI(주)에 있습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인 셈입니다. BTL 사업 종료는 2030년입니다. 경주예술의전당의 공간 활용과 업무효율 개선을 위해서 경주시, 운영회사, 문화재단이 긴밀히 협의해 나가겠습니다.#경주예술의전당 설립 10주년을 맞이해 경주문화재단의 올해 주요 계획은?개관 10주년을 맞는 경주예술의전당은 2019년 전국 최고 수준의 91.63%(전국평균 58.2%) 가동률을 기록할 만큼 수많은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으로 활용됐으며, 연간 21만7000여명의 시민들이 방문해 지역의 대표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난 10년간 경주예술의전당은 그야말로 경주시민들의 사랑과 격려로 성장했으며, 이제는 저희가 되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연말에는 경주예술의전당 우수고객 100인 현판식을 열었으며, 특히 올해는 우수고객 전용 티켓 부스를 운영할 계획입니다.
또한 지난 10년간 경주예술의전당과 함께한 지역 예술인들과 국내외 아티스트들의 역사를 추억할 수 있는 기념물을 조성할 예정입니다. 경주예술의전당 광장 둘레석 하나하나에 경주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 국내외 유명 예술가들 40여명의 사인과 이름 새기려고 합니다.
또한 경주예술의전당에서 활동한 미술가, 음악가, 원로예술가 등 지역예술인 100명의 이름을 남기려고 준비 중입니다. 경주지역 예술인들이 적어도 경주예술의전당에서는 기억되고 존중받는 존재가 되고, 지역예술인들 또한 경주예술의전당을 경주문화의 메카로 인식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한 행사취소로 지역 예술인들의 고통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아직 최종 확정되는 않았지만, 지역예술인들을 위해서 공연 혹은 전시 이전에 출연료의 70%를 선지급하고, 한수원 지역 예술인 지원사업의 수혜 범위를 작년의 두 배로 넓힐 예정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온라인 콘텐츠 제작에 참여하는 공연예술인 약 120명, 창작활동이 활발한 미술인 40명을 선정해 일정액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작년부터 경주택시 할증요금 기점이 경주예술의전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주예술의전당이 경주의 중심지라는 의미입니다. 경주예술의전당만큼 주차공간이 잘 확보된 곳이 드뭅니다. 경주예술의전당 5층 야간 전망은 단연 경주의 으뜸입니다. 이런 공간들이 활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주시민의 유용한 자산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700억 국가 예산이 들어간 공간을 많은 시민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우수한 접근성과 주차공간을 활용해 시민의 명소로 거듭날 수 있도록 고민 중입니다.#경주문화재단의 가치 인정을 위한 발전 방향과 운영방침은? 올해 재단의 전략목표는 ‘출범 10년, 시민과 함께 역사를 만드는 경주문화재단’으로 정했습니다. 또한 2021년 출범 10년을 대비한 3대 전략 가치로서 ①시민 만족, ②문화 공감, ③수평경영으로 정하고, 수준 높은 문화예술 향유 기회 확대, 지역사회 상생, 신뢰 경영 체계 확립을 노력할 계획입니다. 특히, 시민들의 만족도를 더욱 높일 수 있는 우수한 콘텐츠를 선별하고 기획, 차별 없는 문화복지를 지향하기 위한 소외계층 공연장 관람환경 개선, 세대별 맞춤 프로그램 운영을 활성화하겠습니다.
경주문화재단의 전 사업을 통해, 연간 누적 1600명의 이상의 지역 예술인들과 협업하고, 신라문화제를 통한 지역 콘텐츠 개발, 지역 예술인 예우프로그램, 시민 소통을 위한 백스테이지 투어, 리뷰이벤트 등 참여프로그램을 강화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뢰 경영 체계 확립을 위해, 표준취업규칙 모델을 도입하고, 자체 경영진단과 경영전략 내부점검회의 등을 정례화해, 직원 간 정보공유와 환류시스템을 구축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경주문화재단의 두 중심축은 ‘우수한 예술성을 보유한 시민’과 ‘우수한 역량을 갖춘 직원’들입니다. 경주문화재단의 발전은 시민의 역량향상과 직원의 처우개선이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실질적 가치실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끝으로 임기 중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역사의 종착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주문화재단도 시민들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경주시민의 문화적 품격향상, 임기 중 문화재단 시설과 장비 개선, 직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한 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다’라는 것이 우리 재단의 모토입니다. 경주예술의전당을 방문한 고객이 꼭 다시 찾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가올 경주문화재단 10년의 역사를 빛내는 도정에 작은 디딤돌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