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신을 낮추는 것을 예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이를 뽐내는 것은 남들에게 버릇이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인식이 내재된 것이다. 그래서 있지도 않는 ‘저희 나라’와 같은 우리나라를 낮춰 말하는 용어까지 사용하는 경우를 가끔 보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예의 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넘어 국민 전체를 비하하는 표현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민성이 낮아서 문제야” “식민지배가 더 길었으면 우리도 일본만큼 잘 살 수 있었어” “일제시대 때 국민이 개조되었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등 자기비하의 극단을 보여주는 표현들을 가끔 듣기도 한다. 그중 필자가 꼽는 최고의 자기비하 문장은 “조선사람은 때려야 한다”이다. 한반도 사람들이 애초부터 자기비하의 인식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일제식민지배시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풍조가 널리 퍼진 것이라고 본다. 조선은 중국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에 의거하여 죄의 경중에 따른 ‘태장도유사’라는 형벌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형벌은 볼기짝을 때리는 태형과 장형, 노역형인 도형, 멀리 유배를 보내는 유형, 그리고 사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는 중국과 일본 등 인근 동아시아 지역 국가의 보편적인 형벌제도로 우리의 경우 갑오개혁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서구화되는 제도에 부응하기 위해 대한제국에서는 갑오개혁을 통해 재판소 설립하고 법관을 두는 근대적인 사법제도를 마련하였으며 사람을 때리는 비인격적인 태형(笞刑)은 1895년 폐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조선총독부는 1912년 3월 ‘조선태형령’이라는 치욕적이고 민족 차별적인 법령을 제정하여 그들이 이미 일본에서도 폐지한 태형을 되살려 조선인에게만 이를 적용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인은 때려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이후로도 이 말이 온 나라에 퍼졌을 것이고 같은 죄를 지어도 일본인들과는 달리 조선 사람들은 형벌로 매를 맞아야 했다. 망국의 현실이 빚어낸 차별과 오해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정말 미개하고 국민성이 낮은 국민일까? 지금 코로나19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대구와 경북은 전국에서 확진자가 가장 많은 곳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자고나면 늘어나는 확진자로 인해 시민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늘어나는 환자를 수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손님이 줄은 가게와 식당들은 줄어든 매출로 생계를 위협받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심어진 위기극복의 DNA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휴지를 비롯한 생필품들에 대한 사재기가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는 그와 같은 혼란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침착하게 대응했다. 타 지역에서는 병상이 부족한 지역을 위해 환자들을 옮겨와서 치료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기도 하였고 우리 경주도 그들을 품었다. 간호사관생도들은 부족한 의료인력 문제를 돕기 위해 임관과 동시에 이곳으로 달려와 줬고 전국의 의료인과 자원봉사자들은 두 팔을 걷고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병원에서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직원분들의 얼굴에 붙은 훈장과도 같은 반창고는 전 국민들에게 우리가 가진 위기극복의 DNA를 확인해주는 상징이 되었다. 어려워진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을 위해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임대료를 낮춰 받는 착한 건물주 운동을 비롯하여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기 위한 전국민적인 연대와 협력의 정신이 빛을 내고 있다. 국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평가도 아니다. 국제사회에서도 우리의 대응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우리의 대응방식을 배우러 찾아오고 있다. 이러한 우리를 보고 누가 감히 낮은 국민성 운운할 것인가? 우리에겐 국난극복의 DNA가 있다.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이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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