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 줄곧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산림환경연구원이 가까이 있어 매일 산책하고 통일전, 서출지, 정강왕릉과 헌강왕릉으로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해요. 조금 전에도 친구랑 산책 다녀왔어요. 또 바로 지척에 옥룡암, 보리사 등이 연접해 있어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자전거로 논길을 가면 황금들녁을 볼 수 있고 통일전 은행나무길도 산책할 수 있어요” 누구에게나 쉼은 필요하다. 도심의 밀도를 한층 누그러뜨려주는 느슨한 삶의 터전이 있다. 동남산자락 통일로에 있는 산림연구기관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을 끼고 있으며 그 쉼표를 하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수목원의 숲은 주민들의 훌륭한 배경이었을테고 자연과 대화하며 누리고, 온순하고 고요하게 사는 마을. 이곳은 바로 배반동 ‘갯마을’이다. 아무데서나 카메라 셔트를 눌러도 척척 ‘착한’프레임이 연출되는 치유의 숲인 경북산림환경연구원과 바로 연결되는 마을이니 천혜의 환경인 셈이다. 아직도 임업시험장이라고 하는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 숲을 찾는 이들은 연간 그 숫자가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 유명세를 치르는 동안에도 갯마을 속을 걸어본 이들은 흔치 않다. 전체 40여 가구가 살고있는 조용한 이 마을을 중심으로 보리사, 옥룡암, 통일전, 헌강왕릉, 정강왕릉, 은행나무길 등이 이어진다. 그 골목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 마을 전체 가구는 ‘갯마을길’이라는 도로명을 가진다. 축복받은 갯마을엔 누대에 걸쳐 결 고운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갯마을’...형산강 나룻배가 이곳까지 닿던 곳, 1907년 한국경영묘포장이라는 기관으로 출발한 ‘경북산림환경연구원’, 갯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 ‘보리사(菩提寺)’ 등이 바로 지척 경주 시내서 10여 분 거리인 ‘갯마을’은 옛날 남천이 동해로 흐르면서 나룻배들이 닿는 곳이라 하여 부쳐진 이름이라 한다. 약간의 경사를 이루는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작은 샛골목을 이루는 마을은 작고 포근했다. 이 마을 뒤쪽 대나무 숲길을 따라 200여m 오르면 ‘보리사(菩提寺)’란 사찰이 있고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이 연이어 있다.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은 1907년 한국경영묘포장이라는 기관으로 출발해 현재 42ha(약 13만평)으로 910종, 56만 본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전국에서 이곳처럼 평지로 조성되어 있는 곳은 드문 편이라고 한다. 수목원 뒤쪽 계곡이 미륵골이다. 신라 사찰 보리사는 이 마을서 대밭 옆길로 난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정상 가까운 아늑한 곳에 위치한다. 보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다. 현재 현존하는 남산의 가람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절에서 내려다보면 배반들판과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벌지지 등 여러 신라 유적지를 조망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49대 헌강왕의 능과 50대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이 절은 두 왕릉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날 신라시대부터 보리사라 불리워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절 대웅전 왼쪽으로 오르면 통일신라시대 후반의 석불을 대표하는 유명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사진)이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보리사 앞에서 남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산비탈로 가면 마애불이 있다. 보리사 석불좌상은 남산에서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불상이라고 한다. 정결하고 선선하리만치 맑은 보리사 경내는 어느 한 곳 흐트러짐이 없었다. 산사 어느 곳도 맑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유독 시선을 뺏는 꽃이 있었다. 지상의 피조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않을만큼 우아한 ‘애기목련’의 자태였다. 15년여 자란 애기목련은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던 이가 떠나면서 보리사에 맡긴 것을 정성으로 키운 꽃이라 한다. 애기목련은 산사를 찾는 이들에게 수줍은 듯 환하게 손짓하고 있었다. 마침 절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보인(普仁) 주지스님은 수 십년 이 절을 지켜왔으며 대여섯 분의 스님들과 함께 이 도량에서 수도하고 있다고 했다. 보리사는 갯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다. -“아직 순수한 농심이 잘 보존돼있는 마을이지요” “스무살에 시집와서 시어른 모시고 아들 3형제 키우며 이 집서 60년째 살고 있어요” 어느 집에서는 겨우내 묵은 화분 분갈이를 하고 있었다. 시집온 지 40년이 넘었다는 주인은 조상 대대로 이 마을에 살고 있다며 ‘공기 좋고 평화롭다’고 마을을 소개한다. “이 집은 제가 시집오기 전 지었으니 올해로 45년 된 한옥입니다” “아랫마을 1반은 탑골길이고 2반은 갯마을길이예요. 이 중 2반이 우리마을인 갯마을이지요. 아랫마을인 탑골길에는 새로운 이주민이 더러 있지만 우리 마을엔 아직 없는 편이예요. 그래서 아직 순수한 농심이 잘 보존돼있는 마을이죠” 갯마을 주민들은 수목원이 가까이 있어 주말에는 다소간 불편을 감수하고 있으며 대체로 주중에 볼일을 보고 주말은 피하고 있다고도 귀띰했다. 바야흐로 제비들이 드나드는 춘삼월이다. 이 집 한옥의 처마 아래에서 제비집 두 군데를 발견했다. 갯마을에는 모두 친인척 지간이라고하는 윤(尹)씨 성을 가진 5가구가 있었다. 윤씨 성을 가진 한 집에 들렀다. 올해 81세였지만 여전히 고운 어르신은 “스무살에 시집와서 시어른 모시고 아들 3형제 키우며 이 집서 60년째 살고 있어요”라며 웃는다. 이 댁 아들은 아래채에서 본업 외에 취미로 공방일을 하는 작업장(뜨락공방)도 겸하고 있는데 도마, 생활소품 등을 주문제작 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소를 키우지 않는 옛 우사를 이용한 제법 큰 공간이 작업하는 창고였다. -“어른들 사이에선 이곳 갯마을이 자손이 잘되는 터라고 들었어요” “다람쥐도 보고 꿩도 날아와요. 이 동네에 살다보니 너그러워지고 선해집니다. 매일이 ‘소확행’이예요” ‘탑곡마애불상군 600미터, 미륵곡석조여래상 500미터’ 동남산가는길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있는 곳까지가 갯마을의 경게였다. 바로 이곳에서 마치 소나무가 비호 하는듯한 형상아래 신축한옥을 소담하게 앉힌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주인(김명숙 씨)은 이 집을 ‘얼렁뚱땅’ 지었다며 몸을 낮추었지만 이 마을에선 단연 돋보이는 집이었다. 경주서 28년째 살았고 이 집을 지어 온지는 일 년이 조금 넘는다고 했는데 주인의 안식처로 손색이 없어보였다. 집을 에워싸고있는 뒷산에는 오랜 수령의 소나무들과 진분홍 진달래가 천연덕스럽고 뒷마당으로 가자, 작은 평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낮은 담장너머 우람한 소나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주인의 시선에서는 차경이 되는 셈인데 집주인이 누리는 최고의 호사로 보였다. 김 씨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넘쳐흘렀고 그것은 이 마을에 사는 즐거움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마을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목이 탔을 기자에게도 손수 내린 커피 한 잔을 기꺼이 내놓는다. “우리가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여기서 살다보니 제가 즐기는만큼 우리 집을 들르는 분들에게 잠깐이라도 쉬어 가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드려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복된 일인 것 같아서요. 일종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공간 보시’라고나 할까요?(웃음)” “이 마을서는 관광 오시는 분들을 자주 만날 수 있어요. 그들의 행복한 셀렘의 에너지를 엿볼 수 있어 그것 또한 즐거워요. 다람쥐도 보고요. 꿩도 날아와요. 텃밭에 고라니가 배추를 다 뜯어 먹기도 했어요. 하하. 우리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 마을에 와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 같아 늘 감사해요. 외출했다 돌아오면 호박잎에 오이를 돌돌 말아서 가져다 놓으시기도 하고 신문지에다 ‘담 밑에 흩어 뿌리시오’ 라는 글과 함께 채송화 씨앗을 전해 준 동네분도 계세요. 너무 재밌고 예쁜 마음들이잖아요. 매일이 ‘소확행’이예요. 이 동네에 살다보니 너그러워지고 선해집니다” 경주에서도 한정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이들. 그들이 사는 땅, 갯마을..., 갯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면 일상의 나른한 잠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엔 늘 봄 같은 생명이 약동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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