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씨 38왕 시조인 김알지 탄생설화가 깃던 계림 숲을 끼고 거니는 바깥마당에 터 잡은 옛적학교 향교. 외문(外門)을 들어서 오래된 우물 땅 닿을 듯 낮게 박힌 안마당 거쳐 좁은 내문(內門) 디디면,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맞배집 명륜당 강학공간이 훤하게 펼쳐진다. 진리의 등불 넓고 높고 깊게 밝혔을 향교는 최초의 설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신라 때 국학(國學)에서 고려시대 주학(州學), 조선시대 향교(鄕校)로 이어져 인재양성의 산실이었다고 향교 기문 등에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神文王(681~692年) 二年 六月, 立國學(太學) 置卿(太學長) 一人, 又置工匠監俯監)一人, 彩典監(圖畵署)一人. 신문왕 2년(682) 6월, 국학을 세우고 경(卿) 1인을 두었다. 또한 공장 부감 1인과 채전감 1인을 두었다.’ 33대 성덕왕(聖德王) 16년(717)에는 당(唐)에서 공자(孔子), 십철(十哲) 칠십이제자(七十二弟子)의 화상(畵像)을 모셔와 대학에 비치했다. 35대 경덕왕때 대학감(大學鑒)이라고 고쳤다가 36대 혜공왕(惠恭王) 때에 다시 국학으로 되돌렸다. 38대 원성왕(元聖王) 4년(788) 국학의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과거제도를 만들어 인재를 등용했다. 성적에 따라 상, 중, 하의 삼품등(三品等)으로 나눠 고사하였던 까닭에 독서삼품과,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 했다. 상품(上品): 좌전(左傳), 예기(禮記), 문선(文選) 가운데 하나와 논어(論語), 효경(孝經)에 능통한 자. 중품(中品): 곡례(曲禮), 논어, 효경을 읽는 자. 하품(下品): 곡례, 효경을 읽는 자. 삼품 외에 오경[五經: 역(易)⦁시(詩)⦁서(書), 예(禮)⦁춘추(春秋]과 삼사[三史: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한 자는 특별히 우대해서 임용하는 제도도 있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향교(鄕校): ‘부의 남쪽 4리 계림 서쪽 문천(蚊川) 북쪽에 있다. 신라 신문왕 2년(682) 임오에 비로소 국학을 세웠다. 고려 이후로는 향학(鄕學)이 되었으나 터는 그전대로다. 조선조 성종 홍치(弘治) 임자년(1492)에 부윤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하고 제도는 성균관을 모방했다. 임진란 때는 임시로 위패(位牌)를 도덕산(道德山) 두덕암(斗德菴)에다 봉안했다. 그러나 교사(校舍)가 회신(灰燼)되었으므로 오래도록 석전제(釋奠祭)를 결했는데 1600년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중건했다. 성전(聖殿)이 세 간이고, 전사청(典祀廳)이 세 간으로 위패를 도로 모셔다가 봉안했다. 1604년에 부윤 윤성(尹惺)이 중건하니 동무(東廡)⦁서무(西廡) 각기 열두 간이요 전사청이 각기 두 간이었다’ ‘1614년 부윤 이안눌(李安訥)때 중건하였는데 명륜당(明倫堂) 다섯 간, 동재(東齋)⦁서재(西齋) 각 다섯 간이고, 명륜당 동쪽 담 밖에 제독청(提督廳) 네 간이 있다. 그 제독청 동쪽에다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연꽃을 심었으며 돌을 쌓아 작은 누대도 만들고 자미화(紫微花) 한 그루를 심었다. 숭정(崇禎) 후 1655년 명륜당 북쪽에 송단(松檀)을 쌓고 사부(師傅) 정극후(鄭克後)가 기(記)를 지었다. 성전 전면에 옛날에는 계단과 정로(正路)가 없었다. 1669년 가을에 동무와 서무에 비가 새는 곳이 있어 개수하여 공사를 마치고, 부사(府使) 민주면(閔周冕)이 유생(儒生)과 상의하여 안압지(雁鴨池: 동궁과 월지) 임해전의 옛터에 있던 돌계단을 가져다가 성전(聖殿) 계단 밑에 깔고 또 정로도 세웠다. 또 존경각을 송단 동쪽가에 세웠다’【동경잡기】사부 정극후가 지은 [향교송단기(鄕校松檀紀)] 기록 일부를 옮기면 “대저 사람이나 물건이나 하늘과 땅 사이에 난 것은 마침내 없어지고 사라져 버리지 않는 것이라곤 없으나, 다만 성인(聖人)의 도(道)만은 만고에 걸쳐 길이 남아, 해와 달과 더불어 밝음을 같이하니, 이것은 배와 수레가 다가오고 이슬과 서리가 내리는 까닭과 같다. 무릇 피와 기운을 지닌 자라면 누구라도 어버이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다. 수목이 그 자리에서 생겨나 자라고 무성하고 말라버리는 것이 사람의 일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어쩌다가 성인이 노닐며 읊조리는 곳과 여러 제자들이 열을 지어 모이는 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아깝게 여기고 보호하여 오래될수록 쇠미해버리지 않는 것은 공경하여 보존하기 때문이다. 궐리(闕里)*의 단(壇) 위에 있는 은행나무는 그것이 어느 해에 시들고 어느 해에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행단(杏亶)의 이름은 길이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러서도 어제 일과 같다. 이것은 수목이 생겨나 무성하고, 죽고 또 오래 사는 것도 또한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가 패망한 고려 태조, 국도(國都)를 경주로 개칭하고 국학을 향학으로 개편 이후, 조선시대 향교는 공교육의 정통을 고수하며 고종 31년(1894)에 단행한 갑오개혁에서 성균관을 근대식 교육기간으로 개편하여, 원성왕 4년(788) 시초된 과거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인재양성의 지방교육기관으로 역할을 다했을 것이다. 경주향교는 건물규모로 경상북도에서 가장 크며, 나주향교와 동일한 전묘후학(前廟後學) 전형적인 배치구조로 향교의 표본이다.*중국 산동성 곡부현에 있는 마을, 공자가 살던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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