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신평사람, 신평마을’이라 불리고 있는 천군동에 있는 한옥 마을. 천군동이지만 사람들은 흔히 이 마을 사람들을 ‘신평 사람들’이라고 한다. 1979년 보문관광단지 개발로 인해 신평리에서 천군동인 이곳으로 이주해 30여 가구가 42년째 살고 있는 한옥지구다. 경주엑스포, 경주블루원리조트, 경주월드가 바로 지척인 이 마을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동방동 한옥마을처럼..., 천군동 경주블루원리조트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몇 몇 펜션이 있는 동네임을 암시하는 안내판과 함께 바로 한옥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타난다. 펜션은 한옥마을에서 오르다보면 좌측 아동(牙洞)마을 언덕배기에 형성된 대여섯 채의 펜션들을 가리킨다. 리조트 한쪽 자락 아래 한옥마을의 오롯하고 고요한 모습이 보였다. 마을 입구의 구 마을회관과 신축 마을회관을 시작으로 1970년대 옛 한옥주거단지와 가장 트렌디한 관광업체가 묘하게 동거하고 있었다. 물길이 고왔을법한 제법 큰 개울을 따라 길게 들어선 한옥마을의 반대편에는 ‘보문천군지구 도시개발사업 조성공사’라는 대형 안내판이 보였지만 실제 공사의 현장 분위기는 거의 없어 보였다. 한옥마을 바로 옆에는 현장 사무실이 가건물로 지어져있고 부동산 사무실 한 채도 마을 한 중앙에 있어 다소 생경했다. 두 번 이곳을 찾으면서 숨겨져 있었던 한옥마을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잠깐이었고 이 마을이 형성된 배경에서는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1977년 떠나온 고향 신평리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주민들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어 천군동 한옥마을은 천군동 아동리 바로 아래 33세대가 살고 있는 아주 작은 한옥마을이다. 동방동 한옥마을과 함께 이곳 역시 1970년대 후반 이주단지 조성 등 특정 사업에 의해 조성됐다. 넓고 반듯한 골목은 유사했으나 동방동한옥마을이 전부 ‘ㄱ’자형 집이었던 것에 비해 이 마을은 ‘ㄱ’자형은 세 채 뿐이고 나머지 서른 여 가구는 일자형 한옥이었다. 마을 어귀에선 간이 의자를 두고 어르신 몇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떠나온 신평리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주민들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었다. 주민들은 이 마을 입구 승강장에 하루 7번 들어오는 버스를 이용해 시내 병원도 가고 시장도 다녀온다고 했다. 몇 집들은 최소한의 개보수를 한 듯 했고 신축에 가까운 개축을 한 집도 있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국태민안’ 등의 입춘방들이 여느 마을처럼 대문에 써 붙여져 있었다. 경계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없어선지 대문들은 거의 열려있었다. 100평이 넘는 대지의 너른 마당이 있어선지 대부분의 집들에는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경주시 천군동인 이곳은 현재는 ‘보정로’라는 도로명으로 반듯하게 계획된 넓은 골목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마을 분들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서 이곳에 이주한 분들입니다. 마을 인근에 전답(田畓)이 없어 먼 곳에 대토(代土)를 해서 힘들게 농사 지으셨지요” 1971년 박정희 대통령 당시, 대대적인 보문관광단지 조성으로 지금의 ‘신라밀레니엄파크’가 들어선 동네가 바로 이곳 주민들 삶의 터전이었던 신평동이었다. 그곳을 ‘신평동 윗마을’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경주교육문화회관 터가 중간마을인 ‘감나무골’이었고 대형 물레방아가 있는 곳이 ‘못안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세 개 부락이 신평동이었다고. 신평동 윗마을에선 총 55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개발이 되면서 당시 평당 110원으로 일괄 수령이 돼 마을을 비웠다. 1977년이었다. 1979년에 이곳 천군동 자락에 그들이 이주할 마을이 완공되면서 ‘신평동 윗마을’ 33가구의 이주가 시작됐다. 나머지 가구는 인근 도시나 경주 시내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한 주민들은 외지인들이 없고 신평동 윗마을에서 세대를 이어 농사지으며 살아온 이들이 전부였다. 그렇다보니 다른 동네보다는 결속이나 인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을 주민인 전인식 시인은 “이 마을 분들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서 이곳에 이주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인근에 전답(田畓)이 있는 주민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주 하면서 전답은 가장 가까이는 숲머리 보문들이었고 다음으로 불국사 쪽 조양들, 배반들 등으로 대토(代土, 토지를 수용당한 사람이 수용토지 반경 20킬로미터 등 인근 허가구역 안에서 같은 종류의 토지를 구입하는 것)를 했습니다. 천군동 이 마을엔 주거지외에는 농사지을 전답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농사짓기가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겠습니까? 농사지을 땅이 모두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저도 부친 계실 때 현곡까지 경운기 끌고 농사지었습니다. 지금 어르신들도 인근에서 농사짓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이야 길도 나고 괜찮지만 당시는 길도 제대로 나지 않았었어요. 그런데도 구태여 이 골짜기에 이주 해온 것은 마을사람들이 좋아서였고 고향을 떠나기 싫어서였습니다” 이곳 마을 주민들에 대해 전인식 시인이 전해준 말로 가슴은 먹먹해져왔다. 이 마을 주거지 주변에 논과 밭이 보이지 않고 주거지만 들어서 있어서 흔한 농촌 풍경과는 달랐던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마을 한옥 전부 100평이 넘는 집들로 최하가 103평, 신평 윗마을에선 33가구 이주해 와 주민들은 이웃에 대해 아주 소상하게 잘 알고 있었다. 이주 해온 뒤로 다른 유출입 인구가 없어서일 것이었다. “당시 여기는 논이었어. 이 마을 평수는 전부 100평이 넘는 집들이지요. 최하가 103평이고요. 이주하기 전 옛 신평동 세 마을 모두 100호가 넘었지. 신평 윗마을에선 33가구가 왔는데 현재 주민들 수는 많이 줄었어요. 위치가 좋아선지 최근엔 매물을 구하기 위해 외지인들의 방문이 잦은 편이지만 늙은 사람들이 살던 집을 덜렁 내놓고 우리는 어디 가서 살아요?” 어르신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었다. -수 십년을 살아도 다툼 한 번 없는 인정 넘치는 마을/ 마을에 생기 불어넣을 사업 절실 ‘토함산 동대봉산에서 흘러내리던 맑은 물줄기들/ 줄지어 선 아름드리 고목나무숲이 아름다워/ 올망졸망 초가집 마을들이 너무 이뻐/ 발걸음 멈춰 세우던 그리운 고향마을// 신평 거랑 물빛 닮고 청기등뒷산 하늘빛 닮아/ 넉넉히 인심 좋고 마음 고운 사람들/ 고향이 좋아서, 사람들이 좋아서/ 여기 서른 몇 집 옹기종기 옮겨 앉았네’-‘신평마을’ 전문. 이곳 한옥마을 입구에 서있는 시비의 전문이다. 옛 고향인 신평마을을 그리워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 대한 애정과 사랑도 느껴지는 이 시는 신라문학대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고 최근 ‘검은 해를 보았네’ 라는 시집을 발간한 전인식 시인(농협경주시지부장)이 쓴 시다. 전인식 시인은 부친이 살던 집을 개보수해 ‘시 쓰는 농부’라는 당호를 쓰며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에 대해선 누구보다 애정과 사랑이 특별한 그다. “시가 새겨진 큰 바위도 신평 옛 마을 뒷산에서 어르신들이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겁니다. 제가 문인이다보니 어르신들이 오래전부터 고향에 대한 글을 요청하셔서 미루고 있다가 야단맞고 지난해 지은 겁니다(웃음)” 그는 첫 일성으로 ‘수 십 년을 살아도 다툼 한 번 없는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라고 이곳 천군동 한옥 마을을 소개했다. 전 시인은 “저도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던 집에서 같이 살았고 부친이 돌아가시고 다시 수리를 해서 살고 있습니다. 신혼 생활도 여기서 했습니다. 경주월드와 경주문화엑스포가 1.1㎞내에 있고 바로 이 마을 야산 뒤에 블루원리조트가 위치해 접근성이 뛰어나 좋은 정주 요건을 가지고도 활용이 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라고 했다. 현재 주택들은 지은 지 40년이 넘어서 지붕 누수 등 노후화가 심각하다. “우리 마을의 경우, 한옥특화마을 등으로 지정 받아 기와 보조금이라도 지원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시에서 지원을 해 주어서 인근에 물놀이 오는 이들에게 숙박할 수 있도록 한옥의 장점을 살린 민박집(게스트하우스 등)을 운영하는 등 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만의 장점을 살려 활용 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태풍 ‘미탁’으로 인한 주민들의 안전 위협, 경주시와 개발업자 속히 대책 마련해야 마을에는 신평마을 청년회 일동이 ‘개발보다 주민 안전이 우선이다’, ‘무분별한 공사 때문에 주민들이 위태롭다!’라는 플랜카드를 내걸고 있었다. 이러한 현수막이 걸린 것은 이 마을 바로 윗마을인 ‘아동마을’을 택지 정리해 보문천군지구 주택개발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공사 중이었던 것에 기인한다. “지난해 10월 3일 태풍 ‘미탁’이 왔을 때 토목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태풍으로 임시 다리를 만들어두었는데 철거했다가 태풍이 온다고 저녁에 다시 묻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 시설물이 불어난 빗물에 떠내려 와 마을 다리를 막는가하면, 건설자재들이 마을로 덮친 것이죠. 물이 넘친 마을 여기저기엔 항아리 등 가재도구가 유실되고 연로한 어르신들은 뒷산으로 피신하기에 이르렀고요” <사진참조▽> 무분별한 공사가 주민들의 안전에 위협요소가 되고 있는 것. 지금껏 이 마을이 형성되고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난해 처음 발생한 일이어서 주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시에도 민원을 제기하고 답변도 받았지만 개발업자에게 책임을 넘기고 개발업자는 자금난을 이유로 서로 대책과 보상을 미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토사가 쌓여 하상이 높아진 상태여서 많은 양의 비가 오면 다시 지난해 같은 상황이 재발될 우려가 있고 이 마을 바로 위에서 공사한 자재들이 유실되는 등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하루 속히 개발업자와 경주시는 경각심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해 주민을 안심시켜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제반 작업을 시행해야 하는 시점으로 보였다. 개발업자나 경주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해선 안 될 일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