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재미난 이야기를 한다. 듣고 있던 사람이 낄낄대며 반응한다. 그런데 웃으면서 박수까지 치는 사람이 있다. 웃을 때마다 사정없이 친다. 그 사람은 무조건 한국인이란다. 또 있다. “○○는 어디 갔어?” 하고 물어보면 “아마 화장실 갔을 걸?”하면 외국인이고 “몰라, 화장실 갔을 걸?”하고 대답한다면 100% 한국인이다. 모른다면서 어디 갔는지 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한국인들뿐이란다. 한국인은 뭘 해도 한국인답다.
이런 한국인들이 요즘 사랑에 빠져있다. 어디에 빠졌을까?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트로트가 그 주인공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지금이 가장 뜨겁지만, 20년 전만 해도 ‘왜색’이니 ‘뽕짝’이니 하면서 평가절하 되었던 트로트가 오늘의 주제다.
국어사전에 트로트(Trot)는 ‘빨리 걷다’, ‘속보로 가다’라는 말이다. 종종걸음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트로트의 원류인 엔카에서도 보통 빠르기는 안단테 트로트(Andante Trot), 조금 느린 템포는 미디엄 트로트(Medium Trot)라고 한다. 재미있는 건, 엔카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인 트로트 리듬이 서양의 ‘폭스 트로트(Fox Trot)`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이다. ‘여우’의 우아한 발걸음이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일본을 거쳐 한국까지 온 것이다.
트로트나 뽕짝이 주는 어감이 좀 그렇다 해서 2010년, 국회의원과 가수들이 모여 트로트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니 재미있다. 거기서 트로트를 대체할 용어로 ‘연가(演歌, 엔카의 한국식 표기)’·‘아리랑’·‘성인가요’ 등이 거론되었지만 트로트를 뛰어넘진 못했다. 평가를 떠나 참 한국답다 싶다.
요즘 핫(hot)한 트로트 가수 유산슬은 “5분 동안 끓인 라면~ 꿈과 희망 썰어 넣고 힘을 내자 힘을 내~ 먹어야 산다”며 반드시 희망은 온다고 노래한다. 트로트의 매력은 서민의 삶을 반영하고 또 어루만져준다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내 나이가 어때서>나 <백세 인생>도 마찬가지다. 유행곡 가사가 다 그렇지만 트로트는 딱 내 이야기다 싶다.
1990년대의 끈적끈적(?)한 트로트와 달리 2010년 이후 트로트는 체질이 완전히 바뀌었다. 방송의 힘이 그만큼 컸다. 선율, 화성, 리듬, 가창 방식, 가사 내용뿐 아니라, 가수의 연령층, 무대, 마케팅 시장에 이르기까지 시스템 전반이 바뀌었다. 젊고 끼 많은 가수들의 연이은 등장은 소위 ‘관광버스 메들리’ 이미지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이 여세를 몰아 다른 장르 리듬과의 혼성을 시도하기도 하고, 트로트를 소재로 한 다양한 경연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있다.
음계와 리듬만으로 보면, 한국 트로트는 일본과 서양의 음악을 혼합한 퓨전음악이라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무미건조하게 보면 말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대중이 불러오고 음계와 리듬 그 사이를 넘나드는 꾸밈음들로 오늘날 한국형 트로트가 자리매김한 것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한국인의 정서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의 트로트는 죄다 일본의 번안(飜案)가요였다. 가령 1921년 박채선·이류색이 부른 〈이 풍진 세월〉도 일본 〈마시로키 후지노네(眞白き富士の根)〉의 번안인 것처럼. 하지만 이 노래의 원곡은 잉갈스(Jeremiah Ingalls,1764-1828)가 작곡한 〈When We Arrive at Home〉이라는 찬송가를 또 번안한 것이다. 이것이 문화가 가지는 속성이고 트로트도 그 궤적을 따른다.
같은 곡이라도 진행방식과 해석도 나라마다 다르다. 어릴 때 듣던 내 외할머니 찬송가는 왠지 뽕짝 같고 노동요 같은 느낌인 것처럼 말이다. 내 할머니 호흡으로 민요적인 창법으로 부른 번안가는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노래이다.
10살짜리 트로트 신동이 토해내는 노랫가락에 한국인의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가 떠올라 두서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한국인의 정체성 하면 뭐가 더 있을까. 아, 한국인들은 자동차 핸들 왼쪽에 달린 방향지시등 레버의 쓰임을 전혀 모른다. 우회전은 물론 좌회전할 때도 절대 깜빡이를 안 켠다. 하나 더. 가게 출입문에 붙어있는 ‘미세요/당기세요’는 해독할 수 없는 외계어다. 한국인들은 밀어야 할 때 당기고 당겨야 할 때 민다. 보무도 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