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은 주거다양성의 측면에서 우리 주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건축유형이다. 문화재보호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일상적인 한옥주거지로, 도시의 한 켠을 살짝 비켜간듯한 일상과 장소성을 간직하고 있는 집단 한옥지구가 경주 동방동에도 있다.
동방동 한옥지구는 1970년대 후반에 조성된 50여 채 도시한옥으로서 아직까지 기본적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당시의 한옥 건축 양식이 보존돼 있고 온전히 주거지로 기능을 하고 있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의외로 이곳 마을은 아는 이가 드물다. 이 동네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4차선 국도변 왼쪽에 형성된 마을로서 동방동 와요지와 신라가족호텔사이에 있는 반도시·반농촌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한옥지구로 경주시내서 자가용으로 10여 분 소요된다.
이 한옥 지구 앞쪽으로는 국도를 완충하는 녹지 공간이 있고 오래된 수령의 다양한 수종들이 조성돼 있다. 이 동네 뒤로는 동해남부선 기차가 지나간다. 지난 2일 찾은 이곳은 코로나 19로 ‘시절이 하 수상’한 탓인지 동네 골목에는 인적이 끊겨 있었다. 그러잖아도 작은 가게 하나 없는 순도 100%의 한옥주거지역이라 더욱 고즈넉했다. 그러나 마을 여기저기에선 봄의 신호가 감지되었고 50여 가구의 집들에는 봄단장이 한창이었다. 반듯하게 넓은 시원스런 골목풍경은 이색적이었다. 주택 모두 1978년 지어졌다고 하니 42년 세월의 흔적을 제각기 띄고 있었다. 조금씩 집을 수리하거나 전면 개축했으나 원형(‘ㄱ’자를 본채로 하고 아랫채로 창고와 화장실로 구성된 집) 그대로를 간직한 집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조성 당시의 담벼락이 아직 그대로 있는가하면, 거의 대부분의 담벼락은 새로 칠해져 나란히 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이 한옥지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동방동 와요지(동방동 343-4) 부근 일원에 조성된 택지 형태와 신라가족호텔(동방동 267-25) 옆 택지가 있는데 이 두 지구는 다소 다른 분위기였다.
-동방동 한옥지구는 법정동인 월성동의 9통(사두골, 장골, 뒷골)과 10통(탑골, 초동골)의 일부인 아담한 동네 ‘동방(東方)’은 시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동방이라 칭하기도 하고 경주시내에 원이 있어서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10리밖에 뜻있는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어서 고을이름을 ‘도음동’, ‘도음방동’ 등으로 부르다가 ‘동방’으로 했다는 2가지 유래가 있다.
동방동은 법정동인 월성동의 9통과 10통, 11통까지의 동네인데 이곳 동방동 한옥지구는 9통(사두골, 장골, 뒷골)과 10통(탑골, 초동골)의 일부인 아담한 동네다. 9통은 18가구, 10통엔 30여 가구가 있으며 현재 9통의 도로명은 후곡안길, 동방북1길, 동방북길이며 10통 마을의 도로명은 동방북2길, 동방북3길로 이뤄져있다.
한편, 이 동네에는 사적 제263호, 경주 동방동 와요지(瓦窯址)가 있다. 조선시대 기와를 굽던 가마터가 발견된 곳으로 1977년 9월 취락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택지공사가 계속되던 중,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해 9기(基)의 와요(瓦窯)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한옥지구는 국토교통부 한옥 지원사업으로 선정돼 2015년부터 천군동 부지에 80가구 규모로 조성된 한옥 전원마을의 한옥 단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 마을에는 삶의 지층이 선명한 오랜 시간성과 1970년대 당시의 한옥의 건축미가 있어서다. 이 동네 대부분의 한옥 대지는 70여 평 내외의 균일한 대지로 구성돼 있지만 동방북1길의 세 군데 집은 원래의 집터였기 때문에 100평이 흘쩍 넘는 마당 넓은 집도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재일교포 한 사람이 택지비를 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우연하게도 월성동 제9통 정공화 통장 댁에 들렀고 안주인(윤금자, 62)과 차 한 잔을 함께하며 이 동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동방동 와요지를 바로 뒤쪽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뒤쪽 담을 일부러 낮춘 마당 넓은집이었다. 봄이면 와요지 등성이에 보라색 꿀풀 등이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이 집 마당에는 노란 복수초가 봄의 전령임을 증거하고 있었고 만개한 청매화와 백매화의 진한 향은 이른 봄 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잘 닦여진 항아리는 발질반질 윤이 흘렀고 안주인의 섬세한 손길은 집안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80년 결혼하자마자 이 집에서 40년째 살고 있다는 윤금자 씨는 “그때는 이 일대가 논이었습니다. 윗단지와 아랫단지가 개인 사유지여서 시에서 매립을 해 땅값을 내야했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재일교포 한 사람이 택지비를 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이 지구 택지조성위원장이 ‘택지값을 내야하는데 재일교포가 이 구역 택지비를 대신 내주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택지비는 없이 건축만 각자가 자비로 했어요. 기와 정도는 지원을 받았고요”라고 했다.
-“영일 정씨 집성촌이어서 ‘형님’ ‘아즈버님’‘동서’로 인사하고 살았지요” “최근엔 젊은층이 유입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현재 당시 건축의 형태를 그대로 지닌 집은 몇 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한옥 수리가 원활하지 않아 추녀가 없어서 비바람을 그대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목조한옥으로 지은 집도 있었지만 한옥의 뒷부분은 일부 콘크리트로 지은 집도 있었다.
“농사와 생활기반이 이곳이어서 지금까지도 이사는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이 마을 원주민 중에는 제가 가장 어린 새댁으로 불려요(웃음). 이 마을은 영일 정씨 집성촌이었어요. 근처 큰 재실도 있고요. 예전에는 9통에서 두 집 빼고는 다 정씨였어요. 집성촌이어서 모두 ‘형님’, ‘아즈버님’, ‘동서’ 로 인사하고 살았었지요. 그래선지 동네 화합도 정말 잘 되었어요. 서로를 탓하지 않고 나서서 도와주고요. 요사이는 새로 이주해오는 성씨가 유입되었지만요”라고 말하는 윤씨는 이 동네 부녀회장도 오래 했다며 지금도 마을 일에 앞장서서 봉사하는 생활이 즐겁다고 했다.
윤씨의 안내로 개조한 집 내부도 볼 수 있었다. 한옥의 특성상 방속의 방으로 미로처럼 구성돼 있어서 공간 변화가 즐거웠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 개조하긴 했지만 한옥의 정겨움도 남아있어 반가웠다. 옛 부엌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간에는 장작이 수북히 쌓여져있고 가마솥도 걸려 있었다. 아직도 군불을 때는 공간이었다. 또 아래채 한 켠에는 창고도 한 칸 있었는데 탈곡하지 않은 벼가마니를 쌓아둔 모습이 옛 농촌 풍경의 기억을 소환시켜주었다.
“개보수가 자유로워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25년여 전 가장 먼저 개보수 한 집을 시작으로 점차 생활하면서 불편한 부분의 공간은 개보수를 많이 하고 있는 편이지요” “어른이 돌아가시고 시내 살던 자녀가 아파트를 팔고 이사와서 정착하는 경우도 있고 최근엔 젊은층이 유입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은 사라져가는 70년대 당시의 현대식 한옥형식으로 의의 지니며 그 변천 과정 잘 보여주고 있어” 경주시 도시계획과 담당자는 “목조한옥으로 지어진 집들이 도시계획선상에서 지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동방동 일원에 택지식으로 한옥건축물이 일괄적으로 건축된 것은 조성형태를 봤을 때 당시 이주단지 조성 등 특정 사업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원은 특화경관지구(구, 역사문화미관지구)로 1987년 지정되었고 이는 배반사거리~불국사까지 대로변 주변에 무분별한 건축을 피하고 한옥을 짓게 하려고 지정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전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최영기 원장(건축학 박사)은 “이곳 집들은 무척 높은 편입니다. 전부 부연(부연은 겹처마에서 처마 끝에 걸리는 방형 서까래인데 처마를 깊게 할 목적으로 사용하지만 장식적인 효과도 있다)을 달아서 더욱 높아진 형태지요. 그리고 일률적인 ‘ㄱ’자 형으로 지어져 있고 대문의 위치나 대문 형식 등도 비슷해 형태의 다양성이 결여돼 있는 점은 아쉽습니다. 같은 평면 유형이어서 재미가 덜하다고 할까요? 그러나 도로폭도 4미터 정도 되는 요소들은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면서 “이는 당시 한옥 건축의 유행양식으로 볼 수 있고요. 당시 경주의 한옥은 기역자 한옥이 흔치 않았고 일자형이었는데 도심형 한옥형이 반영, 도입된 것 같습니다. 1970년대 경주의 황남, 사정, 노서동 한옥과 평면 유형상 거의 유사해 보입니다만, 지금은 사라져가는 70년대 당시의 현대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택형식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그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라고 했다. 이 동네 어디쯤인가 골목에는 오래된 리어커가 수명을 다했는지 대문 앞에 망부석처럼 세워져 있었다. 울산으로 가는 4차선 국도변을 바쁘게 휙휙 지나쳐 가는 풍경 속에 있는 동방동 한옥지구를 아는 이들은 잘 없다. 이곳 한옥들은 근대적 성격을 갖는 한옥주거지다. 최근에 들어서서 도시한옥에 의해 형성된 경관의 가치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지역주민들이라도 이러한 작은 단위의 한옥을 귀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