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에 관한 편찬 기록은 삼국사기 이후 1459년(세조 5년) 최항(崔恒) 등에게 명해서 12권 문집으로 편찬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전하지 않으며 1926년 6월 후손 최국술이 『고운선생문집』을 간행하고,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자료를 모아 『최문창후전집』 등을 간행하였다. 퇴계학파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학자 성산이씨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는 상주의 조승수(趙承洙,1760~1830)·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1738~1816)의 문인이면서 유정문(柳鼎文)·유치명(柳致明) 등과 교유하였고 조카 李震相에게 학문을 전하였다. 1809년(순조 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후 제주목사·한성판윤·공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1850년(철종 1년) 경주부윤(재임1849.4~1850.4)에 올랐으나 업무수행 중 경상도 암행어사 김세호(金世鎬)의 부당한 탄핵으로 물러났다. 응와는 재직 기간 중 경주최씨집안의 사람을 만나 1850년 3월에 고운 최치원선생의 독서당 유허비문을 지었고 낭산의 산기슭에 비석을 세웠다. 1892년에 간행된 『응와집(凝窩集)』에도 해당 글이 전하며, 『고운집(孤雲集)』 고운선생사적을 보면 「낭산독서당유허비지(狼山讀書堂遺墟碑識)」로 제명이 다르게 표기되었다. 당시 문천을 중심으로 향교관리와 사마소 운영 등 경주최씨의 도움이 많았고 퇴계학을 계승한 경주부윤 이원조에게 독서당 비문을 부탁하며 최치원 선조에 대한 당위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최치원 관련 독서당은 그의 행적과 관련해서 경주 낭산(狼山)과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등에도 나타난다. 경주 독서당은 낭산 서쪽 산기슭에 후손들이 옛 초석(礎石) 위에 집을 짓고 강학공간으로 삼았고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남산의 북쪽에 자리한 낭산(狼山)에는 사천왕사·능지탑·중생사·황복사 등 신라의 불교유적이 산재한 가운데 7번 국도 배반사거리에서 보문사거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의 산기슭에 최치원의 독서당 건물과 비각이 보인다. 경남 산청군 단속사 독서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단속사가 위치한 골짜기 입구에는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과 독서당이 있었고 그 독서당은 고려 때 고승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의 영당(影堂)으로 쓰였다고 한다. 해인사 독서당은 최치원이 가야산에 숨어 살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을 나갔는데 갓과 신발만 숲속에 남겨 놓았을 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해인사의 승려가 그날을 택해 명복을 빌고 그의 영정을 그려서 독서당에 두었다고 한다. 응와는 후한의 경학가 정현(鄭玄)이 고향인 고밀현(高密縣)으로 돌아오자 북해의 재상 공융(孔融)이 그를 존경해 특별히 ‘정공향(鄭公鄕)’을 설치하도록 한 고사와 한나라의 재상 장량(張良)이 공명을 이룬 후 일체 부귀영화를 버리고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일화를 통해 최치원 역시 고향인 경주에 그와 관련된 유적을 설치고, 해인사에 갓과 신발을 남겨둔채 학을 타고 멀리 날아간 사실 등을 이들 고사를 통해 타당성을 피력하였다.문창후 최선생 독서당 유허비(文昌侯 崔先生 讀書堂 遺墟碑) 최치원 선생은 신라 때 사람인데, 세대가 멀어서 상세히 알 수가 없지만, 세상 사람들은 “선생은 학문으로는 성인의 사당에 올랐고, 문장으로는 문단의 맹주(盟主)가 되며, 뜻으로는 백이(伯夷)처럼 세상을 피하였고, 자취로는 장량처럼 선도(仙道)에 의탁하였으니, 선생은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라 논하였다. 아! 선생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급제하였고, 만당(晩唐)의 여러 시인들과 어깨를 겨뤘으며, 「격황소문(檄黃巢文)」 한 구절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입에 전송(傳誦)된다. 동방으로 돌아왔으나 신라의 국운이 다함을 만났고, 기미를 알고는 세상을 등지고 구름처럼 노닐었다. 무릇 나라 안에 명산이라고 일컬어진 곳은 모두 선생을 만나며 이름이 드러났다. 선생은 진실로 천하의 선비였다. 한 모퉁이의 동국(東國)도 선생을 포용하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작은 하나의 고을[州]과 마을[里]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중국 후한 경학가 정현의 향리(鄕里)를 세우고, 안락(顔樂:안자)의 정자를 세운 것을 보면 반드시 태어나 자란 곳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고을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생의 고택은 본피부(本彼部)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있고, 상서장(上書莊)은 금오산 북쪽 문천 위에 있었으니, 동도에서 지령(地靈)이 모이는 곳으로 과연 우연이 아니다. 하물며 성명(聲明)의 기초를 닦고, 후손이 대대로 지켜온 곳이니, 더욱 어찌 사라질 수 있겠는가? 경주 고을의 동쪽 낭산에 독서당 옛터가 있고, 예전 우물도 여전히 남아 있으니, 옛 주춧돌 위에 건물을 세우고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후손 최사간(崔思衎)이 비석을 세우자고 처음으로 도모하였는데, 금년 겨울에 여러 종인(宗人)들이 합의하여 그 뜻을 이루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생의 위대함은 천하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당(堂)으로 진실로 존재감이 부족하지만, 당에서부터 마을로, 마을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천하로 이어진다면 선생의 사업과 문장이 꼭 이곳에서 뜻을 이루지 않았다 할 수도 없을 것이니, 선생의 후손이 되어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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