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명명된 중국 우한발 폐렴이 대한민국과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이 때 인간과 동물의 공존과 공생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의학과 의술과 과학적 장비가 고도로 발달된 21세기에 동물들로부터 오는 바이러스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이유는 무엇일까?
2년 전 질문과 토론하는 수업에 참여한 후 그림책을 읽은 7살친구가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연락이 왔었다.
“엄마! 늑대가 돼지를 잡아먹는 것은 안 되고, 우리가 돼지를 먹는 건 괜찮아?”
질문은 사고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상황을 새롭게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당시 그 아이의 질문은 필자의 일상적인 사고방식과 식습관을 되돌아보게 했다. 다른 동물이 동물을 먹는 것은 폭력적이고 우리가 동물을 먹는 것은 교양일까?
요즈음의 그림책, 동화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읽기가 성행한다. 그 중 모성을 주제로 하는 그림책들은 더욱 인기를 얻고 있는데 특히 오성윤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이나 백희나 작가의 ‘삐약이 엄마’ 등은 거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읽는 책에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없다. 유아기부터 그림책과 동화 등을 통해 동물들과 친숙해진다.
약하고 어린 동물을 잡아먹는 늑대에 분노하기도 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동물들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가지기도 한다. 이런 책들을 읽지 않더라도 어린 아이들은 동물과 인간을 동일시한다. 이렇게 본다면 동심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맥락이 아닐까 한다.
동물들이 가축화되던 초기에는 식육용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을 도와줄 동반적인 역할로 함께 해왔다. 농사짓는 것을 도와주고, 물건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고, 죽고 난 다음에야 인간의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짐승들을 대량으로 사육하기 이전 전통적인 삶에서 소의 역할을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런 때에는 자식 같은~이라는 말의 의미가 확실하다. 동물을 애완용으로 기르는 정도에 불과한 현대인에게 과거 동물들과 인간들과 공존했던 시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보니 현대에 들어와서 가축을 대량으로 기르는 시대가 되면서 자식같은~이라는 의미는 사라졌다.
더 많이 먹기 위해, 더 맛있게 먹기 위해, 부를 과시하고, 미식가라는 타이틀을 위해 동물들은 대량으로 밀집되게 인간이 원하는 부위를 생산하기 위한 용도로 사육되고 잔인하게 도축을 당한다.
아이들은 그림책에서 인간과 동물이 자연 속에서 공존하고 공생의 방법을 배운다. 그런데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울면서 ‘감동적이다’를 외치던 부모도, 교사도 아이들과 맛있는 치킨 집을 검색하고 행복하게 치킨을 먹는다.
갓 낳은 달걀을 먹던 고양이를 악명 높다고 말하던 ‘삐약이 엄마’을 읽고, 우연하게 병아리를 키우게 되는 고양이에게 모성과 감동을 느끼면서도 고양이보다 더 악명 높게(?) 다량의 달걀을 맛있게 요리해서 먹는다. 늑대가 어린양과 아기돼지를 잡아먹는 장면에는 무서워하고 늑대를 향해 분노를 가르치던 부모들은 아이들과 고기파티를 한다.
무자비하게 동물들이 사육되고 살육되는 세상이 인간에게 이롭다고 당연하게 세뇌되고 학습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현재 동물들이 죽어서 분노가 쌓인 바이러스로 반격을 하고 복수를 하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평생을 살아갈 지혜를 유아 때 다 배운다고 한다. 그런데 배움과 실제의 삶이 다른 현대인들을 보며 육식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구제역, 광우병, 사스, 코로나19 사태 등에서 학습된 식습관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