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에 빅3 테너가 있듯이 말러, 지휘자도 빅3가 있다. 토스카니니, 카라얀, 번스타인이 그들이다. 서구에서 지휘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토스카NONO’라 불린 독재자 토스카니니(A.Toscanini/1867-1957)다. 그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다. 19세 때 브라질에서 오페라 ‘아이다’ 공연을 하던 중 갑작스레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악보를 다 암기하고 있어서 추천을 받은 것인데, 사실은 시력이 너무 나빠 악보를 늘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라 스칼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임 시 오페라 개혁에 앞장 서 가수의 앙코르를 없앴다. 지금은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오페라 공연 중에도 관객의 앙코르 요청이 있으면 응했다고 한다. 반파시스트인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 필과 NBC 심포니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절친이었던 푸치니의 미완성 오페라 ‘투란도트’를 초연하면서 “푸치니가 작곡한 건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한 후 무대에서 내려온 사건은 유명하다. 불세출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가 그의 둘째 사위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지휘자는 카라얀(H.Karajan/1908-1989)일지도 모른다. 한때 모든 레코드 가게의 쇼윈도를 점령한 인물이었으니까. 그는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장기 집권하는 동안 음반 산업의 호황을 이끌었다. 소니(SONY)가 CD의 표준을 정할 초창기에 재생시간이 75분이 되도록 조언한 사람이 바로 카라얀이다. 선배음악가인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끊이지 않고 듣기 위함이었다. 그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통해 동향 선배인 모차르트를 전 세계에 마케팅했다. 덕분에 모차르트의 음악은 지금도 초콜릿과 함께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1963년에 완공한 전용 콘서트홀, 일명 ‘카라얀 서커스’는 빈야드 스타일의 원조다. 영상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반세기 전에 이미 ‘디지털콘서트홀(DCH)’의 기초를 닦았다. 20세기 중반에 카라얀과 함께 양웅시대를 열었던 번스타인(L.Bernstein/1918-1990)은 빅3의 마지막 지휘자다. 그는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자랑하고, 사랑하는 ‘미국’ 지휘자다. 토스카니니처럼 당대의 명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을 지휘하게 되었고, 1957년에는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로 오케스트라의 미국시대를 열었다. 1989년에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는 연합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아 합창 교향곡을 연주했다. 미국 지휘자가 유럽의 한복판에서 열린 빅 이벤트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는 청소년 음악회를 열어 클래식의 대중화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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