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벼슬을 멀리한 연일정씨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는 고려 지주사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안강 출신의 산림처사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과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이안눌·윤효전·김존경·목장흠·홍득일 등 경주부윤과 지역의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입지와 시대를 논하였다.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1589~1659)가 남긴 여헌선생 「배문록(拜門錄)」을 보면, 1636년 7월에 “정사물(鄭四勿)과 사부(師傅) 정극후·진사 김양(金瀁)·진사 김공(金羾)·참봉 박진경(朴晉慶) 등 제현들이 배를 타고 부지암(不知巖)을 찾아 정박하니, 선생은 장편의 기행시를 내어 보이시고 나에게 명하여 화답해 올리도록 하였다”며 쌍봉의 형제와 구미출신의 문인들이 여헌 장현광을 찾아간 사실을 언급했다. 쌍봉은 포은 정몽주의 후예로 형 곤봉(昆峯) 정사물과 아우 정사단(鄭四端) 그리고 족인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 그리고 6대손 정충필(鄭忠弼) 등 빼어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됐고, 정사물은 흥해 도화동에 이의정(二宜亭)을 세우고 형제들과 강학하며 후진을 양성해 흥해의 학문발전을 도왔다. 쌍봉 사후 1692년에 손자 정시석(鄭時錫)이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을 찾아 조부의 행장(行狀)을 부탁하였다. 쌍봉은 1577년 1월 경주에서 태어나, 5세에 모친상을, 39세에 생부상을 당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종조부 정윤금(鄭胤金)의 후사를 이었다. 18세에 경주이씨 이홍각(李弘慤)의 따님과 혼인하여 슬하에 정호(鄭㙱) 등 3남 3녀를 두었다. 평생 유학의 도리를 지키며 수신의 덕목을 행하였고, 1620년 안강현 하곡동(霞谷洞)에 별장을 짓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말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과 금정도(金井道:충청도 청양) 찰방(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42년 66세에 「서악지(西岳志)」를 편찬하였고, 1643년 67세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이내 사임하고, 78세 되던 해에 회혼연(回婚宴)을 열고 스스로 ‘쌍봉(雙峯)’이라 하였다. 1708년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묘지명을, 번암(樊巖) 재제공(蔡濟恭)이 묘갈명을 지었고, 몽암(夢庵) 이채(李埰) 등이 제문과 만사를 지었다. 훗날 1809년 하계정사(霞溪精舍)에서 문집을 간행하였고, 1814년 8대손 정래영(鄭來永)이 안강현 하곡리에 성산사(聖山祠)를 세워 추모하였다. 아쉽게도 『쌍봉선생문집』에는 수재정에 관한 글이 없고, 쌍봉에 대한 연구 역시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쌍봉과 서악서원의 관계 그리고 도통연원과 사우관계, 영남남인과 근기남인의 입장 등 살펴봐야 할 점들이 많다. 필자는 얼마 전 대동학문학회·경북대 퇴계연구소 주최의 [영남지역 퇴계학맥의 전개]에서 경주의 퇴계학맥 발표에 대한 토론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쌍봉 정극후가 그 중심에 있었다. 퇴계의 직전제자, 2전제자 등 퇴계의 도통연원을 경주의 주요 가문과 동떨어지고 회재학과 우재학이 중심인 안강에서 퇴계의 학맥을 찾으려는 시도는 참신하였다. 수재정(水哉亭)은 옥산서원 자옥산 서편 그리고 삼성산 동쪽 아래인 하곡에 위치하며, 『맹자』「이루(離婁)下」에서 제자 서벽(徐辟)이 공자가 물에 대해 ‘수재(水哉)’라 칭송한 이유를 묻자, 맹자는 주야를 쉬지 않고 흐르는 근원의 물은 콸콸 쏟아져, 웅덩이를 채우고 난 뒤에 계속 나아가 온 바다로 들어가며, 근원이 있는 것은 이와 같다라 한 말에서 뜻을 취하였다. 지금도 수재정 앞에는 계곡물이 콸콸 흘러 물의 근원을 살피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지만, 수재정 역시 남아있는 시문 자료가 소략해서 문학적인 가치를 담기에는 역부족이고, 다만 후손이 남긴 시문을 통해 내력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쌍봉이 삼성산에 아래에 작은 집을 지어 은거하였고, 후손에 의해 계승되어 오다가 식호와(式好窩) 정엽(鄭燁,1695~1775)에 이르러 중수되면서 수재정으로 불렸으며, 명고(鳴皐) 정간(鄭幹,1692~1757)은 「하곡의 수재정. 매호 손덕승의 시에 차운하다. 정자는 쌍봉 정극후의 별장으로, 그의 현손의 아들인 정엽(자 여장)이 중수하였다.霞谷水哉亭 追次梅湖孫丈德升韻 亭卽雙峰鄭公克後藏修之所 其來孫燁汝章父重修」고 기록한다. 이후 성주출신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이 「水哉亭 在慶州 次重修韻」을 짓는 등 다수의 시문이 전한다. 이렇듯 한문고전번역이 즐거운 이유가 오랜 시간 묻혀진 값진 보물을 찾는 쾌거에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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