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석가탑을 조각했던 백제 석공 아사달을 찾아 먼길 달려온 아사녀가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몸을 던졌다는 영지, 석가탑의 조성에 얽힌 애절하고 슬픈 사랑의 전설이 서린 영지의 한 자락에 가만히 엎드린 숲 속 서라벌요. 천년 전 사랑과 그리움으로 절규하던 아사녀가 오늘에 되살아난 듯 흙을 빚고 그 흙에 혼을 불어넣어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 우향 김두선(여 66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1184) 여류도공을 만났다. 한낱 볼품없는 흙이 그를 만나면 생명력을 잉태한 분청으로 살아나고 쉽게 지나치는 아주 평범한 주변경관이 그에 의해 화려하고 신비한 도자기문양으로 승화되어지는 성스러운 현장이었다. 귀여운 손자들의 노는 모습이나 영지의 야경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그대로 도자기에 승화시키는 방식으로 신비롭고 은은한 멋을 담아내는 그만의 작품세계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천년동안 살아있다는 열가지 문양의 십장생. 연꽃 위에 동자들이 어우러져 노니는 문양으로 극락세계를 표현하는 등 외형적인 예술감각 뿐만 아니라 내면의 깊이가 작품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현대미술대상전 최우수상, 전통도예대전 대상, 한일국제미술대전 대상, 대통령 표창 등 화려한 수상경력과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영국 등지에서 가진 60여 회에 이르는 전시회가 독보적인 분청도예의 대가임을 증명한다. [열일곱살에 5남매의 소녀가장, 먹고 살기위해 도자기 구워] 경남 고성이 고향인 선생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이 투하되었던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도공이었던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도자기를 제작했었다. 8살 때, 작업장 겸 집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폭파당하기 전까지는 아주 부유한 생활을 했다. 폭격으로 집과 공장을 모두 잃었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해방을 맞았다. 일가는 빈손으로 귀국하여 부산 영도의 아리랑고개에서 옹기를 구워 연명하는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굶주림과 병고로 언니를 잃었고 남동생도 몹쓸 병을 얻어 백약이 무효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남동생을 살려보려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는데 결국 동생마저 세상을 등지고 그 충격에 어머니는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그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열일곱, 본래 칠 남매였지만 둘은 이미 세상을 떴고 5남매의 가장이 되어있었다. 5남매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했고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보아왔던 도자기 굽는 일 외에는 할줄 아는 게 없었다. 아들이 가업을 잇는 게 일반적인데 선생이 호구지책으로 가업을 잇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빚 때문에 살던 집에서조차 쫓겨나 오갈데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고 사정을 딱하게 여긴 친구 어머님의 도움으로 방을 얻고 부산극장 뒤에서 경남미술학원을 개원하면서 가세가 안정이 되었고, 범일동 삼일극장 앞에 부라자종합기술학원까지 개원해 편물, 그림, 도자기, 자수, 요리 등을 지도했다. 처음에는 미싱을 만질 줄도 몰랐었는데 무엇이던지 한 번만 보면 할 수 있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기에 계속 연습하다보니 전문가가 되었다. 신기술에 관심이 높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아떨어져 집을 여덟 채나 장만할 만큼 돈도 벌었고 명성도 쌓았다. 스무살이던 당시 부산라디오방송에 매주 15분간 출연하여 각종 여성들의 신기술에 대해 대담형태로 강의하여 인기가 좋았다. 이사벨여고, 구화학교 등에 강의를 나가기도 했었다. [일과 동생들 뒷바라지 위해 결혼생활 포기] 스물다섯살에 가문 좋은 윤씨 집안으로 출가하여 남매를 낳고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 결혼 4년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양반집안에서 결혼한 여자가 사회생활을 한다는 게 용납이 안 되던 시절이었고 동생들을 키워야하는데 일을 접고 살림만 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던 선생은 결국 재혼하지 않고 남매를 잘 키우겠다는 약조를 하고 이혼을 하고 만다. 이혼한 몸으로 더 이상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수 없어서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원을 모두 정리하고 경주로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경주와 우향선생의 40년을 헤아리는 깊은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경주에 와서 곧바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20가마정도를 굽는 동안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한 점도 구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하던 기억을 스승 삼아 도예의 길에 도전한 것이 무모할 정도로 그 길은 어렵고도 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굳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학원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 집을 8채나 장만했기에 여유가 있었는데 가마에 불을 한번 올리려면 약 2백 만원 어치 정도의 나무가 소요되었고 간혹 완성된 작품이 나와도 팔 줄을 몰라서 경제적 어려움은 더해갔다. 그러면서 집을 모두 팔았고 지금은 이 집밖에 없다고 했다. 세상인심이란 평소에 선생님하며 따르던 사람이 작은 일에도 노동부에 고발을 하는 등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도 많았다고 한다. [세계에 우리문화 알리는 문화전사] “실패가 오직 나의 스승이다”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일하고 실패를 하면, 그 실패가 주는 교훈을 거울삼아 또 시작했다.” 가끔 들어온 내용이지만 실패를 거울삼아 일어서기까지는 뼈아픈 인내가 따랐을 것이다. 10년 전 보증을 서는 바람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작업장에 불까지 나서 잿더미로 변했을 때도 그는 의연하게 다시 일어섰다. 자그마한 체구가 빚어낸 작품이라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대작들, 눈길을 끄는 많은 작품들은 실패와 아픔 속에서 건져 올린 그 혼의 결정체이리라. 도자기 속에 나무하나를 그려도 죽은 그림이 있고 살아있는 그림이 있듯이 정성과 혼으로 그림을 그려 넣고 자기를 굽는다. 일하는 순간이 즐겁고 일에만 묻혀서 살다보니 교재가 없어 지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국가 3절의 자료화면에서 우향선생의 도자기 문양 새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함께 경주를 지켜 가는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이제 절정에 이른 그의 작품은 독특하고 다양한 문양으로 외국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그의 작품은 보통 몇만불을 호가하는 대단한 평가를 받는다. 때문에 요즘은 일년 중 절반은 외국에서 생활할 정도로 외국에서의 활약이 크다. 이러한 인연으로 근래에 들어 3년 전부터 미국 뉴욕에 소재한 대학생들이 한 달간의 일정으로 서라벌요에 합숙을 들어온다. 매년 20~50여명의 대학생들이 이곳에 와서 숙식을 하면서 한국의 전통예절, 역사교육, 다도, 도자기체험, 유적답사 등 다양한 교육을 받고 돌아간다. 1인당 천불씩의 교육비를 받지만 돌아갈 때 자신들이 손수 만든 작품을 가져가면서 만족해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선생이야말로 한국의 혼을 세계 속에 심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열아들 부럽지 않을 효자인 아들 윤영철(42 생활도자기)씨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작업에 임하고 있었고 홍익대 미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인 딸 윤수영(40 서울)씨도 잘살고 있다. 이젠 동생들과 자식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웠고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도 이루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동안 이곳에 전시관과 내.외국인들이 묵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장을 이루는 게 꿈”이라는 그는 가업을 이어 생활자기를 제작하는 아들 윤씨와 함께 서라벌요에서 흙에 묻혀 스스로 살아 숨쉬는 도자기가 되기를 소원하는 듯 했다. 비 내리는 영지는 아사달의 부르짖음과 아사녀의 기도소리마저 시공을 건너 사랑의 노래로 피워내고 있었다. 우향 김두선 선생은 잊혀지지 않는 석가탑의 전설처럼 천년을 이어갈 또 다른 사랑을 도자기의 표면에 깊숙이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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