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향교, 서원, 정자, 재사(齋舍), 비각 등은 우리의 대표적인 유교 문화유적이자 문화재다. 사액을 받은 서악서원, 옥산서원, 용산서원과 원사당(院祠堂), 정자 등은 수 백년의 전례와 전통의식을 고스란히 전승해 오고 있다.
정자를 바라보면서 선인들의 삶과 사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선현들을 추모하는 재사를 여러 문중에서 건립했고 이러한 유교 유적 475개소가 경주 각 지역 읍면동에 흩어져있는 것이다. 격심한 세월의 변화 속에서 점차 퇴락해가는 전통유교의 문화유적들을 기록하고 보전하기 위해 경주의 유교문화유적을 집대성한 단행본 ‘경주유교문화유적(2011, 경주향교)’이 발행된 바 있다.
‘경주유교문화유적’은 경주시내 23개 읍·면·동에 산재해 있는 원사(院祠)와 정재(亭齋), 고택(古宅), 비각 등 모두 475곳을 조사해 이를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정리해 지역의 조선조 유교문화 유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경주유교문화유적’에서 전체 내용을 집필한 조철제(경주문화원 이사)선생이 쓴 ‘경주유교문화유적 해제’를 바탕으로 경주 유교문화유적의 현황(지역의 범위 및 설정, 유적의 종류, 건립연대)과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주시내 23개 읍·면·동에 산재해 있는 원사(院祠)와 정재(亭齋), 고택(古宅), 비각 등 경주 유교문화유적 모두 475곳 조철제 선생은 “조선시대 경주는 영남의 웅부였습니다. 읍성 안 관아의 건물이 즐비했고 향교와 사마소 등 공공건물에선 아직도 선인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듯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요. 또한 경주에서는 시대에 따라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신라 이후 전조(前朝)에 대한 자긍심으로 경주민들의 의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높았습니다. 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은 바로 우리 경주시민들과 함께 크고 작은 공간을 형성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향교와 서원, 정자와 서당, 종가와 재사, 충효의 정려비각 등 많은 유적들을 마을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잘 관리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대다수 건축물은 퇴락 일로에 처했거나 허물어지고 터만 남은 것도 많습니다” 라고 말했다.
“경주시내 23개 읍·면·동에 산재해 있는 원사(院祠)와 정재(亭齋), 고택(古宅), 비각 등을 조사한 결과 모두 475곳 이었습니다. 이 조사는 각 지역에 흩어진 유명한 서원과 재사는 물론 깊은 산골과 오지의 작은 유적까지도 조사의 대상이었지요. 이 조사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발생했는데 재사(齋舍)의 경우 창건 연대는 물론 봉향 인물의 생몰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있었고 건축 양식과 특징, 편액 및 주변경관과 환경 등은 다음 과제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경주지역 유형적 유교문화의 정리가 처음으로 이뤄진 점에선 의의가 크다고 봅니다”
-경주지역에서 가장 주목할 곳은 ‘강동면’ 유적, 그 중에서도 양동리는 강동면 전체의 29% 경주 유교문화 유적의 범위와 대상은 다음과 같다. 우선 지역의 설정에 있어서 그 범위는 현재의 경주시 행정구역과 구제 행정구역을 참고해 경주지역 외에도 포항과 영천, 울산지역의 일부지역 유적도 포함시켜 다소 포괄적인 범위로 정했다. 특히 포항 기계면은 옛 경주향일 뿐 아니라 지금도 경주의 각종 향의(鄕議)에 동참하고 있어서다.
그 대상 유적으로는 경주향교를 비롯해 경주 관아, 전(殿), 원사당(院祠堂), 영당(影堂), 묘우(廟宇), 사지(祠地), 정(亭), 서당(書堂), 고택, 재(齋), 비각, 유물관 등이다.
경주지역 유교문화유적 475개소를 지역 단위로 살펴보면 강동면 82, 안강읍 50, 내남면 43, 외동읍 35, 건천읍 29, 기계면 27, 양북면 26, 기북면 12, 남산동 7, 산내면 6, 서면 10, 서악동 6, 천북면 11, 탑동 13, 감포읍 12, 현곡면 15, 황남동 5, 양남면 6, 교동 4개소 등이다.
여기서 보듯, 경주지역에서 가장 주목할 곳은 강동면이다. 강동면은 전체 475개소 유적 중 82개소의 유적을 가진 것으로 전체의 17%를 차지했다. 특히 강동면 양동리는 24개소로 강동면 전체의 29%다. 양동리 유적은 대부분 여강 이씨와 경주 손씨의 것이지만 여강 이씨가 훨씬 많았다. 강동면에는 이들 두 문중 이외에 청안 이씨, 안동 권씨의 유적도 많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향교는 경주향교 이외 사마소와 정풍루를 포함시켰다. 정풍루는 사마소 이건 과정에서 건립된 것이므로 사마소의 분신으로 볼 수 있어서다.
또 조선시대 경주 관아의 건물은 읍성 안에 많았으나 대부분 훼철되거나 이건됐다. 관아의 부속 건물은 현재 경주문화원 경내의 것으로 한했다.
그 외 경주객사 동경관도 포함됐다. 묘우로는 일반 사우와 부조묘(不祧廟,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인물은 신위를 옮기지 않고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 대상들은 4대 봉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 기제사를 받게 됨)도 포함됐는데 경주의 부조묘는 일반적으로 11위로 꼽고 있다. 11위는 강동면 양동리의 손소, 이언적, 손종로, 내남면의 김호, 최진립, 안강읍의 권응생, 신상뢰, 이경한, 양북면의 김석견, 천북면 최봉천, 현곡면 서유 등으로 이 중에는 국불천위와 향불천위, 문불천위가 있어 그 위상은 같지 않다.
-정자가 많은 지역은 재사도 많으며 선인들의 문화유적 밀집된 지역, 경주지역 정자와 서당의 절반은 해방 이후 건립되거나 중수 사지(祠地)는 대원군 집정 시 훼철된 서원이나 사우가 대부분이다. 조사 결과 경주 읍면 지역의 정자와 서당으로 정리한 곳은 180개소였다. 그 분포를 살펴보면 강동면 34, 안강읍 22, 내남면과 양북면, 외동읍이 15, 건천읍과 기계면이 14, 서면과 천북면이 6, 감포읍과 남산동이 5개소 등이었다.
한편, 경주의 180개소 정자와 서당의 건립연대를 보면 1900년대 건립된 곳이 126개소로 가장 많았으며 1800년대 26개소, 1700년대 11개소, 1600년대 5개소, 1500년대 7개소, 미상 5개소였다. 이로써 1900년대 건립한 것이 전체의 70%를 차지했다. 1900년대 126개소 중 1945년 이전 건립은 41개소이며 이후의 것은 85개소였다. 즉, 경주지역 정자와 서당의 절반은 해방 이후 건립되거나 중수한 것으로 파악된 것이다.
이는 후손들이 선인이나 현조를 추앙하려는 추세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문중 화합의 목적으로 지은 것이 다수 포함돼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후대 지어진 정자는 종래의 승지나 산수와 어우러진 정자와는 사뭇 다른 것이 많았고 민가와 구분짓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고택은 정(亭)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고택의 당호를 곧잘 ‘~~정(亭)’으로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사는 본래 묘소와 산림을 수호하고 시제 때 제관이 머물며 제기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재사는 주로 한적한 산기슭에 많으나 후대의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경주 읍면 지역 총 재사는 114개소로 지역별 재사의 분포로는 강동면 16, 안강읍 13, 외동읍 10, 내남면과 기계면 9, 현곡면 8개소 등이었다. 재사 역시 강동면과 안강읍에 가장 많다. 이 두 지역에서 전체 재사 중 25%를 차지하고 있다.
정자가 많은 지역은 재사도 많으며 선인들의 문화유적이 밀집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총 114개소 재사의 건립 연대를 보면 1900년대 건립한 재사가 85개였고 전체의 75%에 이르렀다. 이 중 1945년 이전은 19개소였다. 재사도 정(亭)과 같이 점차 증가 추세다.
한편, 비각은 묘비는 제외하고 비각이 있는 것을 원칙으로 포함시켰다. 신도비, 정려비, 사적비 등으로 구분지었다. 비각의 예로는 강동면의 동강서원신도비, 황남동의 신라경순왕전비각, 황오동의 남득온 효자비, 탑동의 알영정비, 시동의 월성이씨정려각, 안강읍의 효부이씨효부각 등이 있다. 또 유물관도 포함되었는데 기북면의 덕동민속전시관, 안강읍의 어서각, 옥산서원유물관, 회재유물관 등이다.
-“향후 점차적으로 유교건축물의 특성 등을 포함한 모든 자료 종합할 필요” 조철제 선생은 “당시의 조사로 경주지역 유교문화유적을 총망라해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 작업의 결과는 장차 우리의 후손들에게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경주지역 유교문화유적의 기초 자료조사일 뿐이었습니다. 봉향자나 건립자 및 소재지를 명시하는데 그쳤으며 대상 인물의 행적과 사상을 자세히 기술하지 못했던 점이나 건축양식에 대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편액과 상량문, 주변의 경관과 수목현황 등 환경도 조사되지 못했습니다”라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향후 점차적으로 유교건축물의 특성 등을 포함한 모든 자료를 종합할 필요가 있으며 지금도 기존 유적은 관리보존하기 어려워 훼손이 거듭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