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달콤하고도 사나운 연년생 남매는 나를 엄마로 키워내고 있다’라는 표현에 눈이 멈춘다.
엄마가 남매를 키우는 게 아니라 그 귀여운 악마들이 한 여성을 노련한 엄마로 조련한다는 그런 뉘앙스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집만 해도 그렇다. 사춘기 아들 녀석과 부대끼다 보니 그렇게 곱고 다소곳하던 우리 와이프 입에서 거친 육두문자가가 아주 자연스레 튀어나온다.
부모가 자식을 키운다는 표현은 일반적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엄마는 똑땅해, 우리 공주님이가 맘마 안 먹어서 너무너무 똑땅해”, “아빠가 좀 도와줄까?”하는 코맹맹이 소리나 경상도 아빠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소리나 모두 내 입장이 아니라 아이 입장에서의 주어다. 아이 입장을 어른인 엄마나 아빠가 대신해주는 거다. 그런 관점이라면 아이들이 부모를 키운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일방이 타방을 키우고 양육한다는 말은 적절치 못하다 싶다. 엉겁결에 부모가 되고 또 그 자식이 된 거지, 오랜 준비를 거친 프로 수준의 부모와 아이란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부모고 자식이고 다들 오늘은 처음 살아보는 애송이란 말이다. 미리 읽어둔 육아 관련 서적은 현장에서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겨우 잠들었다 싶어 아이를 바닥에 눕히는 순간 아기가 눈을 번쩍 하고 뜬다거나 내 손가락을 스윽~ 움켜잡는데 무슨 책이나 이론이 도움이 될까. 그래서 뭔가 어설픈 부모와 뭐든 낯선 아기란 조합은, 차라리 서로가 서로를 키운다고 하는 게 맞지 싶다.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999 제작)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검은 슈트에 검은 안경을 낀 사이보그가 인간을 심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구 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만은 안 그래. 번식을 위해 한 장소의 모든 자연 자원을 소비해 버리지. 그럼 너희들은 생존을 위해 또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지”며 인간을 포유류는커녕 지구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벌레 정도라고 폄하한다.
결정타는 그다음으로 이어진다. “이 지구에는 너희들과 똑같은 방식을 따르는 유기체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그건 바이러스(virus)야. 지구에 있어 인간은 암적인 존재지” 지구를 접수한 로봇에 따르면, 인간은 지구의 희생을 전제로 존재를 이어가는 질병이나 암(癌)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 존재가 영장류는커녕 오히려 지구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라는 사실은 ‘공생(共生)’의 중요성에 빛을 더한다. 서로의 관계가 가지는 오묘한 원리는, 맨몸끼리 서로 부딪치는 이종격투기 같은 데서 더 잘 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천적 관계가 있어 절대 강자도 없고 그렇다고 절대 약자도 없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 아픈 자식이 안 아픈 자식보다 부모 입장에서는 더 효자일 수 있다. 당신들이 그저 걱정하고 기도해주기 위해서라도 더 건강해야 할 이유일 테니 말이다.
각기 다른 ‘입장’과 그럼에도 지향할 ‘공생’을 한 공간에다 녹여낸 것이, ‘따로 똑같이’ 아닐까 싶다. 대들보와 지붕과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지붕이 똑같이[전체집합]라면 대들보는 따로[부분집합]다. 아이고야, 이게 더 어렵다.
차라리 생명체의 모든 유전 정보를 담은 유전자의 도움을 받자. 그 염색체(DNA) 구조를 살펴보면 가령 말과 당나귀는 단 3.1%의 차이가 난다. 당나귀 하고 노새 하고 헷갈려하시는 분들을 위해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인간과 고릴라는 딱 2.3%의 차이로 나뉜다. 그럼 침팬지는 어떨까? 겨우 1.5%의 차이란다. 그럼 사람끼리는 어떨까? 놀라지 마시라. 0.1% 라는 아주 작은 유전적 차이로 남자와 여자가 나뉜단다. 영(ZERO)에 가까운 그 차이 때문에 와이프는 내가 왜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지, 그것도 꼭 세탁기 통 옆에다가 벗어두는지 알지 못한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꼭 수정될 부분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