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재봉틀이 지나간 자리에서 잊혀가는 우리 전통의 옛 복식들이 하나둘 재현된다. 배냇저고리부터 수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손끝에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미적 감각이 되살아난다.
“우리 전통한복은 몸을 옥죄지 않은 자유로움이 있어 어떤 체형이든 그 사람의 스타일에 맞춰 연출할 수 있는 것이 매력이죠”
옛 선조들의 정서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전통한복의 멋을 지키며 전통 복식의 복원 및 재현, 일상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생활한복을 짓는 이, 바로 전통복식연구가 강미자(58) 씨다.
“어릴 적 어머니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를 놓는 모습입니다. 지금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지만, 그 시절 어머니 모습은 정말 예쁘고 고왔죠. 제가 바느질을 하고 한복을 짓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어릴 적 어머니 영향이 컸을 거에요”
전북 남원에서 2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녀가 한복을 시작하게 된 것은 갓 스무 살이 지나면서다. 강미자 씨는 한복이 우리나라 전통문화이자 우리 민족의 가장 기본이 되는 옷이라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져왔었고, 전주에 있는 양재학원 한복반에 등록해 버스로 오가며 지치는 줄 모르고 전통한복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느 정도 한복 짓기에 익숙해질 무렵 그녀는 공식적인 첫 한복으로 외조부모의 회갑을 기념해 수의를 손수 지었다. 정성을 다해 완성된 수의는 어머니는 물론 외조부모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한평생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 길 가면서 자식들에게 얻어 입고 가는 옷이 수의인만큼 지금도 수의를 지을 때는 살아있는 사람 옷보다 훨씬 더 많은 정성과 마음이 들어갑니다”
경주로 시집온 강미자 씨의 바느질은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계속됐다. 밤낮없이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활비를 보태온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만의 한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져 갔고 그렇게 2003년 봉황로와 가까운 거리에 금림주단을 오픈했다.
하지만 전통 한복 연구에 대한 갈증을 해갈시키기에는 늘 부족한 것만 같았던 그녀, 결국 한복 명장 류정순 교수가 지도하는 경성대 평생교육원에서 한복지도자 과정과 전승복식 과정을 수료하며 그녀의 꿈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늦깎이 학도로 그녀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었다. 교육원 수료 후에도 전통복식문화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 자료를 토대로 재현해 내며 끊임없이 복식 연구에 매진해 왔다. 그러한 열정으로 2014년에는 경주작가릴레이전 작가로 선정돼 궁중의상과 일반 사대부, 서민들이 입었던 출토 복식을 재현한 ‘조선 시대 복식전’을 선보였다. 2015년부터는 ‘실크로드경주 2015’ 무대에 올랐던 처용무 복을 직접 제작했으며, 2016년에 본격적으로 신라 시대 복식을 재현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지역의 전통공예인들과 신라복식연구회를 발족했다. 같은 해에 경주신라고취대의 의상제작에 참여했으며, 이후 지역의 주요 행사마다 주요 인사들이 신라복식연구회가 만든 신라복을 착용해 선보이며 신라복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얼마 전 고구려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신라행렬도가 새겨진 토기가 발굴돼 정말 반가웠죠. 비록 신라복식연구에 대한 자료로써는 아쉬웠지만 앞으로 신라 복식을 연구할 수 있는 유물들도 새롭게 출토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높아졌죠”
앞으로도 전문가적 고증과 현대적 의미를 부여해 신라복식재현에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그녀는 그것이 곧 경주시민으로 신라문화를 이해하는 길이며, 나아가 문화관광 자원화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10여년 전 어느 날이었어요. 초로의 남자가 한복 가게에 들어와 빨간색 꽃수 치마, 비취색 저고리를 입은 마네킹 앞에 서서 옷의 가격을 물었죠. 누가 입을 거냐고 물으니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젊은 시절에 저세상 떠난 부인 산소 갈 때 꼭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씀에 제 가슴이 함께 먹먹해 졌어요”
그날을 계기로 옷을 지을 때 의뢰하는 사람의 마음을 우선순위에 둔다는 강미자 씨는 옷을 입을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펼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오늘도 정성을 다해 옷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