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발 동작으로 파리의 독보적인 발레스타가 된 탈리오니에게 라이벌이 등장한다. 1834년 파리오페라극장에 합류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파니 엘슬러(Fanny Elssler/1810-1884)가 탈리오니의 경쟁자가 된다. 당시 엘슬러는 카추샤(Cachucha)라는 춤으로 파리 사교계를 풍미했다. 카추샤는 캐스터네츠를 들고, 우아하면서도 경쾌하게 추는 스페인 춤인데, 파리 왕실의 초청을 받을 정도로 엘슬러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탈리오니와 엘슬러는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스타일은 완전 달랐다. 탈리오니가 청순가련한 스타일이라면 엘슬러는 관능미가 넘쳤다. 청순한 선배 탈리오니는 6살이나 어린 엘슬러의 관능미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두 사람은 묘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단 한 번도 무대에 함께 선 적이 없다고 한다. 1845년 런던에서 세계적인 발레리나 4인의 참여로 열린 파 드 카트르(pas de quatre) 이벤트에도 탈리오니는 있었지만 엘슬러는 없었다. 이러던 두 사람이 함께 한 것이 있다. 바로 죽음! 둘은 1884년 같은 해에 사망한다. 최고의 라이벌 탈리오니와 엘슬러, 이들만의 경쟁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두 사람을 모두 빼닮은 신예 카를로타 그리시(C.Grisi/1819-1899)가 1841년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발레의 여왕으로 등극한 작품은 낭만발레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지젤(Giselle)이다.
지젤은 그리시를 열렬히 짝사랑하던 테오필 고티에(T.Gautier/1811-1872)의 대본으로 탄생했다. 고티에는 그리시를 염두에 두고 지젤을 구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시의 연인은 안무가 쥘 페로(J.Perrot/1810-1892)였다. 결국 고티에는 연적에게 패배하고, 그리시의 언니와 결혼하고 만다. 이후 두 딸을 낳았지만, 죽을 때 부른 마지막 이름은 처제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미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지젤은 발레를 새로운 경지에 올린 라 실피드의 성공에 자극받아 1841년 파리에서 초연된다. 라 실피드처럼 푸앵트와 로맨틱 튀튀의 낭만주의 형식이 뚜렷하다. 현실이 아닌 환상을 추구하고, 요정, 처녀귀신이 등장한다. 그러나 1868년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낭만발레는 급속하게 퇴조한다. 이후 발레의 주도권이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넘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