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아파트 입구로 올라왔다. 색 바랜 낡은 키패드에 집 동호수를 누르고 이어 비밀번호도 누른다. 그러자 통유리 문이 스르륵 하고 열린다. 버튼을 눌러 12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걸 확인한 후, 옆에 있는 비상구로 몸을 튼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자, 그럼 올라가 볼까” 가벼운 걸음으로 첫 계단을 디딘다.
여기까지가 지금 아파트로 이사를 온 이후로 계속된 ‘계단 오르기’ 루틴(routine)이다. 오르다 보면 저 밑에서 띵똥~하고 누군가 엘리베이터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편함 대신 운동을 선택했다는, 근거 없는 우월감에 괜히 계단을 꾹꾹 눌러가며 오른다. 힐끗 보니 4층이다. 아직까지는 발걸음도, 숨쉬기도 괜찮다. 계단 옆으로 난 창밖을 여유롭게 바라본다. 노을이 이쁜 걸 보니 내일 날씨도 맑겠구나 싶다. 아직까지는 힘이 남아서일까 오늘 있었던 일들도 떠올렸다가 저녁에 아들 숙제 좀 봐주라는 아내의 카톡 문자도 떠오른다.
등에 땀이 살짝 나는 듯한 신호가 오는 걸 보니 ‘여기가 10층이겠군’하고 고개를 들어 보면 정말 그렇다. 와, 괜히 으쓱해진다. 거의 1년 넘게 계단 오르기 중이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앙증맞은 세발자전거가 맞아주는 12층, 먼지가 소복이 쌓인 장바구니 캐리어가 보이면 13층이다. 상가(喪家)엘 다녀와서 그랬는지 신주에 소금 뿌리지 말라는 15층 안내 문구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부터가 ‘깔딱 고개’다. 힘없이 벌어진 입 사이로 가쁜 숨을 뱉지만 가슴은 벅차고 등에서는 땀이 제법 흥건하다. 쉼 없이 움직여 온 두 무릎을 바늘로 마구 찌르는 듯 따끔거리는 마(魔)의 구간이다. 이걸 넘어서야 정상(頂上)인, 홈 스위트 홈이 나온다. 요동치는 맥박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다 보면, 마침내 반가운 까만색 사이클이 눈에 들어온다. 19층이다. ‘오늘도 성공했구나!’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얻은 것이 참 많다. 몸이 당연히 건강해진다. 불과 몇 분 동안이지만 제법 운동이 된다. 5층(예전에 살던 아파트)에 맞춰진 몸이 7층, 8층 하고 한계(!)를 넘어서다 보면 재미도 나지만 덤으로 몸도 좋아진다는 걸 느낀다. 계단 오르는 걸 무시할 수 없는 게, 단위 시간당 산책(6cal)보다도, 빠른 걸음으로 걷기(120cal)보다도, 계단 오르기(221cal)가 효과적이라고 한다. 요즘처럼 날씨가 쌀쌀해져 따로 운동하기가 번거로울 때는 계단 오르기가 안성맞춤이다. 잘 알다시피 계단은 오르는 게 효과적이다. 내려가면 무릎에 충격이 집중되어 좋지 않다.
덩달아 마음도 가벼워진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몸은 힘들어지는데, 반대로 마음은 심플하고 선명해진다고 할까. 마라톤 결승점에 가까워질수록 거친 숨을 내쉬지만 선수들 얼굴이 평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고대 인도 문화에서 수행은 곧 고행(苦行)이라고 할 정도로 몸을 혹사시켰던 이유는, 몸을 괴롭히는 만큼 반대급부로 마음이 해방[해탈]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겨우 몇 계단 올랐다고 마라톤 선수에 수행자의 해탈까지 거론하는 건 확실히 오버이지만, 심신이 가볍고 단단해지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또 계단에서는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계단에 소금을 뿌리는 사람도 있지만 몰래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다. 아니 좀 많다. 1층 흡연 장소가 마련되어 있지만 급해서일까, 계단에서 볼일을 본다.
그럼 흔적이라도 남기지 말아야지 남겨진 재와 꽁초가 정말 얄밉다. 하지만 가지런히 놓여있는 택배물을 보다 보면 마음은 이내 따뜻해진다. 생수통처럼 무거워 보이는 물건들은 대충 놓아둘 만도 한데 사람 다니는 통로를 피해 한쪽에다 정성 들여 쌓아 놓은 모습을 보면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싶다. 감사할 일이다.
아,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날 밤도 역시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17층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는 아가씨와 짐승(?)처럼 헐떡이는 내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아~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온 계단을 흔든다. 17층 아가씨, 이 자리를 빌려 거듭 사과합니다. 본의 아니게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지금까지 나의 계단 오르기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