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의 청허재(淸虛齋) 손엽[孫曄,1544~1600,자 문백(文伯)]은 고조부 손소(孫昭)-증조부 손중돈(孫仲暾)-조부 손경(孫曔)의 가계를 이루고, 부친 진사 손광호(孫光皜)와 모친 장수황씨(長水黃氏) 별제 황계옥(黃季沃) 따님의 소생으로 가학을 계승했다. 1568년 진사에 올랐지만, 스스로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성리학에 매진했으며, 경주부윤 이정(李楨)·구봉령(具鳳齡)·조목(趙穆)·최현(崔睍)·조정(趙靖)·임용재(林慵齋)·신지제(申之悌)·금란수(琴蘭秀) 등과 도의(道義)를 맺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해서는 경주․팔공산 등에서 활약하였고, 곽재우·류성룡·정경세 등과 화왕산 회맹을 가졌으며, 그가 남긴 「용사일기(龍蛇日記)」는 본인이 직접 목격한 경주지역 임진왜란의 기록물로 귀중한 가치를 갖는다.
특히 집경전(集慶殿)에 봉안된 태조의 영정을 이황의 손자인 예안(禮安)의 이영도(李詠道) 서당에 임시 봉안하고, 향교 대성전의 오성십철십이현(五聖十哲十二賢)의 위패를 금곡사(金谷寺)에 모셨다가 다시 옥산서원으로 이봉(移奉)하는 등 유자의 도리를 존숭하였고, 회재와 그의 아들 이전인이 유배지에서 주고받은 글을 정리한「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의 발문과「잠계이공묘지(潛溪李公墓誌)」를 적었다.
손엽은 1582년(선조 15) 정자를 짓고, 물의 맑은 성품을 따르고, 구름의 공허함처럼 욕심 없이 비우는 마음을 닮고자 자신의 호를 청허(淸虛)로 삼았으며(取其水淸而雲虛 因以自號焉), 정자 주위에 계구대(戒懼臺)·망미대(望美臺)라 명명하고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수신(修身)을 살폈다. 사후에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이 묘지명을 지었고, 병화(兵火)로 무너진 정자를 후손들이 중건하였는데, 후손인 손상효(孫相孝)가 연안김씨 김위(金鍏,1795~?)를 찾아가 「수운정중수기(水雲亭重修記)」를 부탁하였고, 여러 문인들의 글이 『청허재집』에 수록되어 그의 행적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명도(明道) 정호(程顥,1032~1085)·이천(伊川) 정이(程頤,1033~1107) 이정자(二程子)는 안락정(安樂亭) 글에서 ‘물은 차마 멈출 수 없고, 땅은 차마 황폐해질 수 없다(『性理大全』:水不忍廢 地不忍荒).’고 하였으니, 현자를 숭상하고 학문을 사모하는 정성이 이같이 부지런하고 중요하다. 더구나 후손들이 조상을 위해 아름다움을 전하고 후대가 오래도록 복을 누리며 사는 곳에 있어서는 오죽하겠는가? 지금도 양동마을에는 1776년에 건립된 손씨문중의 안락정이 자리하고, 수운정 역시 선대를 기리는 후손의 정성된 마음이 한결같다. -수운정 중수기 영남의 남쪽 월성 손상효 군이 찾아와 “소생의 선조이신 청허공께서 성주산(聖住山) 아래 설천(雪川) 위에 작은 정자 하나를 짓고는 ‘수운정’이라 편액하였는데, 물의 맑음과 구름의 공허함에서 뜻을 취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라 하였다. 이 정자가 거듭 병화(兵火)를 당해 지금은 빈터만 남았고, 거의 몇백년 동안 그저 물이 흐르고 구름만 부질없는데, 지난 을묘년에 여러 후손들이 힘을 모아 재목을 구하고 다시 중건하였다. 당(堂)과 실(室)이 8칸인데, 안에는 도서(圖書)를 쌓고, 밖에는 꽃과 나무를 심었으며, 이곳에 오르고 머물면 매우 사모하는 마음이 든다. 또 책 한 권을 올리며 “이것은 청허유고(淸虛遺稿)입니다. 선조께서 덕행(德行)이 있으나, 지위가 없고, 오래 살지 못하였기에, 세상에 아는 자가 없습니다. 또한 수운정의 승람은 동도에서 으뜸이지만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다만 선조의 명성과 절개 그리고 정자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절경이 유고(遺稿)와 선배들의 시문(詩文)에 대략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알려지고도 믿을만한 것이니, 일의 전말(顚末)을 기록해서 오래도록 이어지도록 한 말씀 내려주시길 청합니다”라 하였다. 나는 “좋다”라 하고, 이에 글을 읽어 내려갔다.
청허자는 진정한 어진 군자로 세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매죽론(梅竹論)」․「일신환유일건곤(一身還有一乾坤)」․「조담경(照膽鏡)」은 기절의 빼어남과 지조의 청고함이 아니겠는가? 말씀은 문장이 되니, 아마도 이는 세속을 벗어나 본성을 보전하는 듯하다.
정자의 경치를 비록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이곳에 대해 고찰해보면, 우뚝 솟은 약산(樂山)․옥봉(玉峯)․학수(鶴峀)․어장(魚嶂)의 산등성이는 물이 용솟음치듯 내달리고, 붓의 뾰족함처럼 불룩하게 솟았다. 소나무와 삼나무 그리고 단풍과 국화가 그윽하게 숲에 가득하였고, 몇 층을 휘감은 듯 아름다운 수묵화의 가리개 같았다. 흐르는 연지(蓮池)·설천(雪川)·금호(琴湖)·광주(廣洲)의 물줄기는 거슬러 오르고, 헤엄칠만하였다. 물고기를 잡으면 은빛 비늘의 물고기가 뛰어오르고, 달을 감상하면 달에서 금빛이 샘솟았다. 위아래 수십리 구불구불한 길은 천척(千尺)의 옥 무지개가 은하계에 누워있는 듯하였고, 곁에는 문원공(회재선생)께서 유식(遊息)하고 서양(棲養)한 도덕봉·화개봉이 있다.
아! 손씨는 수십 세대에 걸쳐 종종 우수한 인물이 많았지만, 한 골짝에 서로 전하는 좋고 아름다운 것이 까마득하게 멀고 오래되면 차마 잊을 수 없게 되고, 정자가 없어져 버리면 차마 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정성을 다해 수리하여 예전처럼 새롭게 하였으니, 사람의 도움과 땅의 영험함으로 모두가 무고함이 없었다.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지 경연춘추관 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연안 김위(金鍏) 삼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