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강동면을 돌아 「안강(安康)」 초입 도로변에 「인동마을」이 있고, 그 앞산 정상에 6.25 「안강지구 전승비」가 있다. 형산강 줄기와 누런 안강 평야를 내려다 보는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이 전투는 우리국군이 1950년 8~9월, 15일간 북괴군와의 치열한 공방전에서 적 294명을 생포하고, 전차 2대 격파, 232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막고,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국군 반격작전의 기폭제가 된, 극히 중요한 전투로 한국전쟁사에 기억되고 있다. -도음산 전투, 김 소위의 2개의 전적비 안강 지구 전투 중, 포항 도음산에서 순직한 「김 소위」라는 군인에게는 2개의 추모비가 있다. 하나는 이 산(山) 정상에, 다른 하나는 국립서울 현충원이다. 이 비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해온 당시 전우 황 규만 소위의 오랜 전우애 스토리가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1)도음산 전적비는 그가 전사하여 가매장되었든 곳의 표지 비석이다. 전면에 ‘육군 김소위 전사란 곳’라고 세로로 써 있고, 그 좌우에 각각 전사한 날짜(1950년 8월 27일)와 국립묘지 ‘1659호’라고 적혀있다. 이 비는 전쟁 당시 그의 전우 황규만 대령이, 그의 유해를 14년 만에 발굴(1964년 5월 29일)한 이후, 현지에 직접세운 것이다. (2)국립 서울 현충원의 묘비는 김 소위의 시신을 도음산에서 찾은 후, 서울 국립 현충원에 안장(1964년 5월 29일)하고 세운 추모비다. ‘육군 소위 김-의 묘’라고 써있다. 국립 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전사자의 묘지와 비는 세울 수 없었으나, 황 대령이 당시 도음산 전투 전황과 김 소위의 죽음을 증명하고, 육군 참모총장에게 탄원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도음산 전투에서 두 소위의 만남(당시 상황) 1950년 8월 27일 도음산 전투 중 열세에 놓인 황규만 소위 부대가 지원부대 소대장인 김 소위를 만나게 된다. 당시 수도 사단 1연대소속으로, 황 소위부대 지원의 명(命)을 받고, 이상 정상 까지 사선을 꿇고 올라온 것이다. 자기를 갑종1기 출신 김 소위라고 했다. 황 소위는 당시 20세로 육사1기 교육 중에 전장에 투입되어 도음산(383미터)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김 소위가 전황을 대강 파악한 후, 적진의 지형정찰을 위해 포복으로 10여 미터 능선을 올라가는데, 순간 적의 기관총사격이 시작되고 김 소위는 쓸어졌다. 황 소위는 참호 속에서 나와 빗발치는 총탄을 꿇고 기어올라, 그의 두 발목을 겨우 잡고 능선 아래로 끌어 당겼다. 그는 절명한 상태였다. 황소위는 대원과 함께 대검과 야전삽으로 땅을 사서 급하게 묻었다. 그리고 큰 돌을 머리맡에 놓고, 주변 고사목 등걸을 표식으로 가매장위치를 표시하였다. 곧이어 적의 역습이 시작되면서 이곳을 떠나야했다. -황소위의 전우애(戰友愛)스토리 (1)김소위의 유해 수습과 국립묘지 안장 그 후 황 소위는 10여년이 지난 후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평소 가음에 담아두고 있던 김 소위의 시신 찾기를 결행한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전투지역 주변을 찾아낸다. 1964년 5월 7일, 안강을 거쳐 도음산 정상을 향해 올랐고, 몇 시간 뒤 김소위를 묻었던 위치를 찾았다. 동행한 위생병과 함께 유해 수습을 하고, 영현 부대에 유골을 안치하여 화장을 시켰다. 그리고 그해 5월 29일,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을 시켰다. 비명(碑名)은 ‘육군 소위 김-의묘’이다. 이름도 유족도 모르는 상태에서 황 대령의 그에 대한 전사확인이 인증되어, 묘역안장과 비(碑)가 마련된 것이다. 지금도 그의 묘비 앞에는 황 장군(나중에 준장으로 진급)의 김소위 전사 인증 표시판이 박혀있다. (2)김 소위의 신원확인과 가족 찾아 주기 그 후 황 대령은 여러 보직을 거치는 동안에도 김 소위의 신원과 가족을 찾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특히 1975년 준장으로 예편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갑종1기 출신 동기생 들을 찾아내고, 결국 그들에게 수소문하여 위패 봉안소에 있던 「김수영(김수영(金壽泳)」이라는 사람이 김소위 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가족도 찾았다. 김 소위의 신원이 확인되었는데도, 지금도 국립묘지 묘비에는 비명을 고치지 않고 그냥 ‘김 육군 소위 김-의 묘’로만 남아있다. 6.25비극의 산물로, 그대로 보존키로 유족과 갑종1기 동기생들이 합의한 결과라고 한다. 그는 김 소위와의 숙명적인 인연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고 ‘자기가 죽으면 장군묘역에 묻지 말고 김 소위 묘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있어, 6.25때 함께 싸운 전우에 대한 의리와 모범적인 군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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