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밥을 먹고 채비를 하고 석굴암을 찾았다. 석굴암 주차장까지 차로 바로 갈 수도 있지만, 석굴암에 대한 예의가 아닌듯해 불국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등산로를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석굴암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가면 길 오른쪽으로 바위 면에 고유섭 선생의 ‘신라의 조각’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은 이 석굴암 불상이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는 숭례문이고, 제2호는 원각사지10층석탑, 제3호는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이다. 하지만 석굴암은 국보 제24호이다.
국보 제1호, 2호, 3호라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문화재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정 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국보는 예술성, 문화재로서의 가치, 상징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순서를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인 석굴암이 당연히 국보 제1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다음은 2017.10.26. 동아일보에 실린 ‘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 칼럼의 일부이다.
“1972년 최고액권인 1만 원권을 처음 만들 때였다. 한국은행은 고심 끝에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인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의 모습을 앞뒷면에 디자인해 넣기로 결정했다. 이어 시쇄품(試刷品)을 만들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 발행 공고를 마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기독교계에서 ‘불교 문화재인 석굴암과 불국사를 1만 원 권에 표현하는 것은 특정 종교를 두둔하는 일’이라고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반발은 거셌다. 반대가 그치지 않자 한국은행은 결국 발행을 취소하고 말았다. 국내 최초의 1만 원권 발행은 이렇게 어이없이 무산돼 버렸다. 결국 이듬해 1973년 세종대왕 초상과 경복궁 근정전으로 도안을 바꿔 새로운 1만 원권을 만들었다. 종교적 논란이 없도록 이번엔 불교 문화재는 아예 제외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특정 종교와 관련이 있다하여 억지를 부리고 결국 시쇄품까지 만들고도 이를 포기하다니…
이런 일도 있었다. 필자가 현직 교장으로 근무할 때이다. 교감 선생님이 모 선생님으로부터 건의가 있는데 복도에 게시되어 있는 석굴암 불상 사진을 철거해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그래서 불상이 눈에 거슬렸던 듯했다. 직접 선생님을 찾아가 설명하고 싶었으나 교감 선생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일러주도록 부탁했다.
“석굴암 불상을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불교와 관련을 짓지 않고 문화재로 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석굴암은 국보 제24호로, 문화재청에 ‘석굴암석굴(石窟庵石窟)’로 등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1910년 경 일본인들이 석굴암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이 문화재를 단지 불국사의 산내암자로 칭하는 것은 모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이름을 되찾아 석불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석굴암으로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 안타깝지만 이 글에서도 그냥 석굴암이라 해야 하겠다.
토함산 석굴암은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석굴암 때문에 통째로 인생을 바꾼 저명한 한 학자가 있었다. 학술원 종신 회원이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낸 박종홍(1903-1976)은 1922년 『개벽지』에 ‘한국 미술사’를 연재하다가 리프스의 미학책을 본 후 석굴암을 찾았다. 그는 이 책에서 석굴암을 설명해 보려고 했다가 엄청난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석굴암을 설명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자 계속할 용기가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기초적인 학문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되겠다고 절실히 느꼈다”
이후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하여 칸트와 헤겔 철학을 연구했다. 그에게는 칸트와 헤겔의 철학보다 석굴암이 더 어려웠던 것이다. 섣불리 석굴암에 대한 글을 쓰자니 무척 부담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