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선생의 유일한 혈손인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은 1547년 정미사화로 평안도 강계에 유배된 부친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학문을 계승하였고, 사후에는 유명(遺命)의 의해 명종에게 진수팔규(進修八規)의 글을 자신의 상소문과 함께 올려 부친의 복권(復權)을 이룬 효성스런 인물로 유명하다. 이렇듯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기본의 도리는 바로 잠계 자신에 대한 엄격한 잣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며, 그는 평소 「서천잠(誓天箴)」을 지어 앉는 자리에 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잠(箴)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경계하는 내용을 담은 글로, 병신년(1536.21세) 12월 기해(己亥)일에 붉은색 글씨로 적고, 훗날 정미년(1547.32세) 5월 2일에 다시금 하늘에 맹세하였으니, 모두 『잠계유고(潛溪遺稿)』에 전한다. 정자(程子)는 “내가 차라리 성인의 경지를 배우려고 노력하다가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가지 선행을 해서 이름을 이루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吾寧學聖人而未至 不欲以一善成名〕”라 하였으니, 잠계는 정자의 말씀을 언급하며 ‘성인이 되려고 공부를 하게 되면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현인(賢人)은 될 수가 있으니, 하나의 선행으로 이름을 이룬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논할 만한 일이겠는가?’라며, 성인을 본받는 일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유학(儒學)의 기본 도리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다만 위인(爲人)을 위해 우선 위기(爲己)를 이뤄야하기에 더욱 위기지학(爲己之學)이 필요하며, 이후에 추기급인(推己及人:입장을 바꾸어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일)으로 이어져야한다. 이는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뤄 타인에 이어지는 인(仁)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엄격한 규범에 몰아넣고 법도를 어기지 않는 것에서 그 시작을 삼는다. 서천잠(誓天箴)은 인욕(人欲)을 배제하고 천리(天理)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성인을 본받으며 꾸준히 노력해야 된다는 핵심내용을 담고 있으며, 잠계는 부친 회재선생과 주고받은 경학(經學) 의의(疑義)를 몸소 실천하고 행동에 어긋남이 없고자 하였다. 당시 회재선생과 잠계의 학문적 계승은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에 상세히 기록되었고, 잠계와 그의 아들 이준과 친교가 깊었든 양동마을의 청허재(淸虛齋) 손엽(孫曄,1544∼1600)이 「관서문답록」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였다. 잠계는 부친의 음덕으로 주어진 벼슬을 마다하고 경학공부와 실천적 자세를 평생의 할일로 삼았으며, 독락당을 지키며 후학양성과 가업을 계승하는데 전력하였기에, 그 공덕을 기려 1780년 후손들이 장산서원을 세우고, 1847년 후손인 이기(李耆)가 『잠계유고』 편찬을 도왔다. 이때 손엽이 묘지(墓誌)를, 김건준(金建準)이 묘갈명을, 송환기(宋煥箕,1728~1807)가 묘표(墓表)를,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서문을, 송래희(宋來熙,1791~1867)가 행장을, 박광보(朴光輔,1761-1839)가 장산서원 봉안문을, 남병기(南炳基,1887-1979)가 장산서원 유허비명을, 강필효(姜必孝,1764~1848)가 자서(自序) 서문 등을 지으며, 유학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서천잠(誓天箴) 차라리 성인의 경지를 배우려고 노력하다가 미치지 못함이 있더라도, 한 가지 재주와 하나의 착함으로는 이름을 이루기가 어려우니,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며 부지런히 일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어야한다. 부지런히 힘쓰고 노력하기를 위로는 임금과 아버지와 조상님이 계신 듯 하고, 아래로는 깊은 못의 얼음을 밟는 듯 조심하여, 온 정성을 다하고 죽은 후에야 그만둘지니, 진실로 어김이 있다면 마침내 이 맹세의 말을 생각할지라.우(又) 한결같은 마음의 사이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의 겨를에 무릇 하늘의 바른 이치와 인간욕심의 싹을 살피고, 만약 그것이 하늘의 바른 이치라면 힘써 그것을 하고, 인간의 욕심이라면 능히 그것을 끊으리라. 만약 이 맹세를 어김이 있다면 하늘이 반드시 벌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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