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포항 접지인 형산(兄山) 에 왕룡사란 절이 있다. 일명 왕룡사원이라 고도하며, 산마루에 흰색대형 좌불이 동해로 흐르는 형산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특이하다. 고려 의종 때(1127-1170)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며, 110여년 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2개의 목조 문무인(文武人) 상 이야기 이 곳「왕장군 용왕전」에 나무로 만든 문무인상(경북 민속자료 제 73호)이 있는 데, 우측은 문인상(키 120여 센치), 좌측은 무인상이다. 문인상은 얼굴이 황백색갈이고, 관모를 쓰고 있으며, 청색 옷을 입고, 왼손으로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무인상의 얼굴은 붉은 색으로 삼지창과, 투구를 쓰고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 특히 문인상의 코 잔등에 칼자국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치수(治水)의 군왕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형산강 주변의 물난리에 대해서는 뾰족한 대책을 마련치 못하고 전전긍긍해 왔다. 마침 대장군인 태자가 이 분야에 조예가 있어 자주 그와 상의하곤 했다. 여름 어느 날, 왕은 이곳 수해방지를 위해 그와 숙의를 했으나 의견차이가 심했다. 서로가 양보 없음에 왕은 내기를 걸었다.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칼을 맞는 걸로 하자고. 왕은 그의 고집을 사전 꺾기 위한 수단으로 일부러 내기를 건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걸자는 왕의 말씀에 태자는 포기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엄한 왕의 분부라 어쩌지 못해 승낙하고 말았다. 결과 왕이 졌다. 태자가 왕을 쳐야하지만 왕을 범할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칼등으로 내리치는 척, 왕의 콧잔등에 상처만 살짝 입혔다. 왕과의 약속을 이행하게 되고, 불충도 면하게 되었다. 이들을 모신 법당을 「왕장군 용왕전(王將軍 龍王殿)」이라 하여, 용왕이라 믿는 경순왕과 왕장군이 주거하는 곳임을 암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목상은 바다 속의 용왕과 신하들이 그려진 큰 탱화 앞에 있는 데, 영조 때 경주 서악장을 지낸「유상익」이란 사람이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형산 산허리 청동불상이 있던 용당터 이야기 중명리에서 형산으로 오르는 중턱에 2미터정도의 펀펀한 넓은 바위가 있고, 형산강을 내려다보며 앞이 훤히 터여 있다. 예부터 용당 터라고 불린다. 여기에 청동불상이 있었고, 아랫마을에 부조장이 생기면서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고, 어부와 상인들의 안전조업을 비는 기도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장터처럼 북적이게 되자, 지체 높은 사람들 사이에 불만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한 유생이 이 불상을 떼어내어 형산강에 던져버렸다. 그런 후 심한 풍랑으로 어부들이 죽게 되고, 고기잡이도 안 되는 등 주변 마을에 흉사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나무로 목상을 만들어 청동불상대신 안치하고, 재앙을 없게 해달라고 빌게 되었다. 이 절 주변을 둘러보면 경순왕을 목상을 만들어 이 용당터에 봉안하다가, 왕룡사 절로 옮기고, 법당(왕장군 용왕전)을 지어 주변에 물속의 왕과 신하, 장군을 배치하여 경순왕과 함께, 치수와 마을의 안녕을 위한 불교기도 도장으로 삼아온 것으로 생각이 든다. ▼형산 왕룡사와 경주사람 고려무신 이의민의 이야기 왕룡사는 형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아 처음 옥련사라 불렀다. 이 절은 고려 무신 3인방의 한사람인 고려후기 경주사람 이의민(?-1196)의 어머니가 노비로 있던 절로 전해온다. 그는 소금장수 아버지와 이 절 종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아버지 꿈에 그가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9층탑을 오르는 꿈을 꾸고, 훗날 아들이 크게 출세할 것으로 믿어왔고, 그래서 가끔 황룡사에 들러 탑에 그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폭행이나 하고 금전을 탈취하는 시장바닥 건달로 자랐다. 당시 안찰사였던 「김지양」이 8척 거구에 힘이 장사고, 배포도 커 쓸만하다 싶어, 그를 개경을 경비하는 군인으로 추천했다. 그는 무술도 잘하고, 특히 수박희(手搏戱)에 능하여 당시 왕(의종)눈에 들어 별장이 된다. 그 후 정중부의 난(亂)에 가담, 장군이 되고, 정중부, 이의방과 함께 3인방에 들었다. 천민으로 결국 당대 최고 권력자 그룹에 속하는 입지적 인물이 되었고, 명종14년(1184)에서 시작된 13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결국 신진 무신 세력인 최충헌의 결사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가족들도 몰살을 당했다고 전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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