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혼자 낄낄대고 있길래 무슨 프로를 보고 있냐니까 ‘무엇이든 물어보살’이란다. 키 작은 유명 코미디언과 전직 농구 선수였던 방송인이 화장도 하고 머리도 이쁘게 치장하고 나온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들 둘이서 의뢰인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다. 고민이 있다면 우리가 도와주겠다는, 센스가 돋보이는 작명인데 눈에 띄는 게 ‘보살’이라는 단어다.
흔히 보살 하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떠올린다. 관세음보살은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보살 중 한 분이다. 보살은 세속적인 성(性)과는 무관하지만 풍만한 젖가슴, 잘록한 허리(내 와이프와 모친은 예외), 손에 든 물을 배고프고 목마른 중생에게 주는, 천상 우리네 엄마 같은 모습이다.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도 유명하다. 손이 천 개요, 눈이 천 개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잠깐. 종교를 이해하는 데 상징이나 은유는 필수다. 가령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는 오병이어(五餠二魚)도 예수님의 궁휼과 사랑의 상징이다. 종교는 일반 상식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천수천안도 마찬가지다. 중생들이 겪는 고통과 그래서 더 간절히 바라는 바가 천 가지 만 가지라 많은 손과 눈이 필요하다.
지장보살도 잘 알려진 보살이다. 보살이라면 거의 부처님 급으로 머리에 보관을 쓰거나 하늘거리는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하고 있지만, 지장보살은 파르라니 스님 머리 그대로다. 지옥세계에 단 한 명이라도 남아있으면, 다시 말해 제도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절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보살이다. 그의 머리는 자비를 상징한다.
원래는 석가모니불이 부처가 되기 전의 모습에만 보살이라고 했다. 그랬던 보살이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처럼 소위 스타급 보살들로 외연을 넓히다가 급기야 유명한 고승 대덕으로까지 확대된다. 원효나 용수처럼 유명한 스님들 이름 뒤에 보살을 붙이게 된 것이다. 지금은 절에 오는 모든 아주머니나 할머니를 보살이라 부른다(남자도 보살이지만 보통 처사나 거사라고 한다).
고유명사로 시작된 보살이 일반 보통명사가 된 이유는, 보살들의 행동강령인 보살도(菩薩道)에서 찾을 수 있겠다. 가령 보시를 예로 든다면 이런 식이다.
“아상(我相), 타상(他相), 그리고 시상(施相)에 집착하고 하는 보시는 세간의 보시일 뿐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청정할 때라야 비로소 출세간의 보시바라밀이 된다”
해석하자면 주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물건이 있으면 그건 그냥 보시이지 보시바라밀이 아니란다. 여기서 바라밀이란 ‘궁극’이나 ‘완성’을 의미하니까 보시바라밀이라면 소위 ‘보시의 끝판’이다. 우리는 언감생심 시도도 못하는, 보살만이 가능한 보시의 완성이란 그럼 어떤 것일까?
흔히 뭔가를 베푸는 쪽은 목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받는 쪽은 이유 없이 주눅이 든다. 분리에서 오는 결과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뭔가를 도와주는 행위가 진정 선행(善行)이 되려면, 가령 받는 이의 진심 어린 감사의 한마디나, 기분 좋게 올라간 입꼬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진정한 보시는 받는 이가 베푸는 이에게 하는 선물이다. 보시는 비분리에서 완성되니까 말이다. 서로 넉넉한 기분만이면 됐지 물건과 주고받는 자는 중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 최고의 보시로 무외(無畏)보시를 꼽는다.
무외보시는 주는 사람[我相]과 받는 사람[他相],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대상물[施相]이라는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보시의 완성이다. 이런 게 어디 있냐고? 집집이 다 있다.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앞에 두고 자식들은 불만이다. “이거 싫어, 저거 해줘” 얻어먹는 주제에 오히려 당당하다. 미안한 건 오히려 엄마다. 더 해주지 못해 늘 미안하다. 보글보글 된장을 사이에 두고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보살과 보살행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