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장수 원효
전인식
골목길에서 한 사내 떠들어 댔네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나빈병과 헌책, 고장난 선풍기를 들고 나갔네그 사내 보이질 않고사금파리 하나에 골목길이 환하였네멀리 내 사는 마을까지 찾아와고래 고래 외쳐던 까닭 몰라텔레비전 보는 온종일이 허전하였네혹, 그가 찾아다닌 것이못 쓰는 물건들이 아니라 어디에도 쓸모없는내 마음은 아니었을까프로야구 중계방송이 끝난 저물녘에서야간신히 생각 하나 건져 올렸네고장난 마음은 생각지도 못하고못 쓰는 물건들만 들고 뛰어나갔던 어리석음들이한꺼번에 노을빛으로 몰려들었네가슴팍에서는 씁쓸함들이 박수를 쳐대는 소리비웃는 소리 들리는 듯하였네눈 베일 뻔했던 사금파리 하나가세상 환히 밝히는 태양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컴컴한 어둠 속으로 날 감금시켰네 가위소리 끊어지지 않던 그날 밤검은 하늘에 뜨는 검은 해를 보았네
-오늘, 내 앞에 원효의 가위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전인식의 시들은 지금 눈과 귀 앞의 사물과 현상, 소리들의 외피 넘어 근저를 꿰뚫고 나아가게 하는 힘과 깨달음이 있다. 사실 진리는 어디 깊은 곳에 숨겨져 있지 않다. 우리 주변에 있으면서 그 본래의 모습을 언뜻언뜻 비치다 사라진다. 그것도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에게만 말이다. 그것이 “먼저 간 사람이 뒷사람/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불러/지붕 하나 방 한 칸/한 마을 다시 만들어 살아가는 마을”(「공동묘지」)을 직관하는 힘이다. 그는 경주라는 곳을 일러 “죽은 사람들이/밤마다 걸어나와/살아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지만, “가르쳐도 금방 까먹고/오래된 것들 위에 열심히 덧칠을”하면서 “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변명을 해대는 공간이라고 한다(「경주」). 놀라운 일이다. 그의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에는 이런 깨달음의 환한 세계가 군데군데 펼쳐져 있다.
‘나’는 골목길에서 떠들어대는 한 사내의 음성을 듣고는 “빈병과 헌 책, 고장난 선풍기” 못 쓰는 물건들을 들고 뛰쳐나간다. 그러나 그 사낸 보이지 않고, 사금파리 하나만 골목길을 다 담고 있다. 이런 엇갈림이 이 시를 추동하는 힘이다. 문제는 텔레비전의 소리와 빛, 그 날름거리는 물(物)이 눈알과 몸을 사정없이 지지고 빨아들이는 시간에 그 사내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 사건이, 바꾸어야 할 것은 “못 쓰는 물건”이 아니라 “고장난 마음”이라는 노을빛 회오(悔悟)로 이어지며 또 하나의 자아가 현실적 자아를 비웃는 소리(“가슴팍에서는 씁쓸함들이 박수를 쳐대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이 보이는 것이 아닌 것을. “사금파리 하나에 골목길이 환하”고 “사금파리 하나가 세상 환히 밝히는 태양”이 되는 순간이다. 그 사금파리 하나는 원효가 들어가고 나오는 통로이고, 내게는 예지의 빛이다. 허나 나의 이런 환한 순간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 그래서 시적 자아인 나는 “가위소리 끊어지지 않던 그날 밤/검은 하늘에 뜨는 검은 해를” 아아, 나를 포함한 미망(迷妄)에 가득한 현생의 어두움을 오오래 보는 것이다. 그것이 진여(眞如)로 가는 단초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