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은 신라와 가야, 유교의 문화가 꽃 핀 지역이다. 특히 경주는 우리의 문화적 저력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거대한 상징이자 자긍심의 뿌리다. 그러나 동시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반출되고 훼손된 가장 심각한 지역이기도 하다. 한말 이후 우리 문화재 유린에 관련한 구체적 기록은 많지 않다.
또한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본 학자들이 대대적으로 고적조사를 행했으나 그에 따르는 보고서 작성에는 소홀했다. 조사 후 보고서가 출간되지 않거나 보고서 자체를 작성하지 않은 것이 많아 그 전모를 파악하기란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이에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이자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자문위원 정규홍 위원은 그의 논문 ‘경주지역에서 유출된 문화재 사례(2016)’에서 일제강점기 등 국난기에 경주지역의 반출된 문화재의 피해사례를 살피고 당시의 사실상을 파악해 문화재 보존과 가치에 대해 주위를 환기시킨 바 있다.
그는 ‘경주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생산하고 보유하고 있었던 만큼 한말 이후 혼란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장 많이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제자리를 떠나 외지로 반출됐다’고 전제했다. 그의 논문에 나타난 1903년 다보탑 석사자 반출, 1908년 선덕왕릉 도굴, 석굴암 감실 내 보살상 도난, 1916년 일본으로 가져가 소개한 분황사탑 발견유물, 1925년 임해전지 훼손, 1931년 인왕리 적석총 도굴, 1934년 안압지 도굴, 1935년 성덕왕릉 도굴, 1936년 경주 석탑 매각 등을 통해 반출된 우리지역 문화재의 대표적 사례들을 짚어 보았다.
-1903년 다보탑 석사자 반출, 1905년 불국사 사리탑 반출, 1908년 석굴암 감실 내의 보살상도 도난, 1909년 석굴암 소석탑 분실..., 일본 박물국에서 한국 유물을 최초로 구입한 것은 1885년으로 경주, 김해 등지에서 출토된 여러 건의 유물들이 보이고 있다. ‘최초로 일괄 구입’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반월성 출토품 15건의 신라토기가 포함됐다. 이때는 미술 고고학 분야의 학자들이 한국에 진출하기 훨씬 전으로 한국에 진출한 도굴꾼들에 의해 출토된 유물들로 추정된다.
1902년에는 세키노에 의해 경주 조사가 실시되는데 경주지역에서 상당한 사진 자료 등을 수집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03년 현재까지 다보탑의 석사자에 관한 기록으로서 가장 앞선 것은 1902년에 불국사를 조사한 세키노의 기록인데 그가 당시 촬영한 다보탑을 보면 가장 앞쪽으로 보이는 기단에는 비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세키노의 방문 당시에 이미 1구는 행방불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2년을 기준으로 다보탑 기단위에 있었던 3구의 석사자는 세키노가 1909년에 경주를 재방문했을 때는 2구는 사라지고 1구만 남아 있었다. 세키노는 사라진 2구는 일본으로 반출되어 갔음을 밝히고 있으나 언제 유출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본으로 반출된 석사자는 일본 또는 이미 프랑스나 영국으로 건너갔다는 여러 설이 있으나 잃어버린 다보탑의 석사자는 일본의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서 널리 알렸으나 아직 행방이 묘연할 뿐이다.
또 불국사로부터 사리탑을 반출한 시기는 1905년 여름으로, 반출자는 악행을 은폐하기 위해 개석(蓋石)이 마치 땅 속에 있던 것을 비가 오면서 외부로 드러나 이것을 일본인 모가 발굴하여 가져온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세키노 다음으로 경주고적조사를 목적으로 한국에 건너온 자는 이마니시 류다. 경주에 18일 정도 머물면서 경주 일대를 경주 부근 남산성, 월성, 명활성, 관문성, 사천왕사, 망덕사, 계림, 문무왕릉, 김유신묘, 안압지, 폐사지의 석탑 등을 조사하고 답사 및 고분을 발굴했다.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에서는 아름다운 보상화문 벽돌과 수십 개의 고와를, 분황사, 월성 등지에서는 평기와, 막새기와 귀면와, 문양이 있는 벽돌파편 등에서 많은 양을 채집했다.
또 남산, 북산, 소금강산, 낭산의 산정에서 완전한 토기 20여 개와 파편을 발굴 채집했다. 출토된 유물과 경주 일대에서 수집한 고와들은 모두 도쿄대학 문과대학으로 반출해갔다. 이들은 여러 번에 걸쳐 전시되고 고고학회의 주목을 받았다. 1908년에는 선덕왕릉이 도굴되고 석굴암 감실 내의 보살상도 도난된다. 석굴암 굴 내에는 10개의 감실이 있고 그 감실에는 10구의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제1감실과 제10감실이 비어있다. 당시 이곳에 잠입한 불법자들의 약탈품이 돼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1909년에는 석굴암 소석탑이 분실된다. 석굴암 본존불 뒤 즉 11면관음상 앞에는 현재 대석만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5층사리탑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석굴 안에는 원래 두 기의 작은 석탑이 있어서 석굴의 본존대불을 중심으로 앞뒤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13년 중수공사를 할때 두 탑이 안치되었던 화강암 대석(臺石)과 작은 석탑(石塔: 상부와 상륜부)이 수습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1909년 2대통감 소네가 경주의 초도순시 때 그 수행원들과 함께 석굴암을 다녀간 후 이 탑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편, 주식회사 한미흥업회사가 설립되는데 이 회사는 한국의 고미술품을 미국으로 수출하고 미국에서 신조품을 수입한 회사로 각 지역마다 지점을 두었다. 미국으로 유출된 상당수의 유물이 이 회사를 통했다. 경주의 유물도 상당수 이 회사를 통해 미국으로 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경주 부근 성지, 사지서 채집한 파형, 당초, 귀판, 전 등 신라 기와 무려 500점 채집, 1918년 경주 고적의 파괴가 극심, 당시 고물골동상으로 등록한 15개소 모두가 고미술품 매매로 추정
1911년 세키노 일행은 경주 일대의 분황사, 망덕사지, 불국사, 견곡면 폐사지, 영천 폐사지 등을 고적조사하고 상당수의 고와를 채집해 갔는데, 그 중 500여 개를 도쿄대학 건축학과 제4회전람회에 진열했다. 신라의 기와(실물)로서 경주 부근의 성지, 사지 등에서 채집한 것으로 파형, 당초, 귀판, 전 등 무려 500점에 달했다.
1912년 개점한 이나모토 골동점은 대구 동성정에 자리하는 것으로 조선 고기물, 고도기와 회화 미술품 등을 가장 많이 가진 골동점이었다. 당시 고물 골동상으로 등록한 업소 15개소 고물상 모두가 고미술품을 매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에는 경주사담회(慶州史談會) 발회식이 개최된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역사지리, 고고학 등의 연구를 하고 경주의 신라유적을 세상에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모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유지들로 결성돼 경주에서는 오사카 긴타로의 수집품을 열람했다. 그해 분황사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탑의 3층에서 석함을 발견했는데 석함에서 상당의 귀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발견한 유물 전부는 1916년 한국에서 학술적 발표가 있기도 전에 세키노가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학계에 소개를 했다. 1918년 경주 고적의 파괴가 극심해진다. 당시 철도공사와 신시가지공사 및 건물신축공사를 하면서 공사현장 가까이에 유존한 고탑이나 성벽을 헐어서 사용한 예가 비일비재했다. 1927년 12월에는 금관총 유물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도난당한 유물은 수 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사히 회수하였으나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 몇 점은 ‘전 금관총 출토’라 하며 도쿄국립박물관 오구라컬렉션에 들어있다.
후지타 료사쿠는 1928년에 구미의 박물관,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재를 살피고 그 실태를 잡지 ‘조선’에 실었는데, 1928년경에 경주의 모로가 히데오가 경주고적보존회 활동과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자이면서 한국 유물을 얼마나 사유화하고 함부로 취급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1932년『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일본으로 반출, 1934년 안압지가 도굴, 1936년 경주 석탑 1기 매각, 1945년 경주분관 적산미술품 문화재 접수 해방 직전 이뤄져
1930년 조선총독부의 경주 고분에 대한 발굴이 ‘연구’라는 명목 하에 계속되자 일부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파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931년 경주 인왕리 적석총이 도굴되고 1932년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가 일본으로 반출된다. 일본인 고서 수집가가 반출해 이듬해 동대사에 소장됐다. 경주 유물의 불법 채집은 1932년 총독부와 별도로 메이지대학도 해간다. 1933년 노서리 215번지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 유물은 후일 한일협정시 반환문화재 중 일부로 돌려받았고 반환받은 금목걸이는 보물 제456호, 금제팔찌는 보물 제454호로 지정됐다. 황오리 제16호분 출토 유물의 일부도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 이어 1934년 안압지가 도굴되고 도쿄대학『문학부고고학연구실 수집품 고고도편』에 나타난 한국 유물 속에는 모로가 히데오가 경주 일대에서 출토한 와편 27점을 게재하고 있다. 1935년 성덕왕릉이 도굴돼 동경통지에 기록된 12지상중 둘은 사라지고 10상만 남아 있었으며 머리 부분은 잃어 버렸다.
도쿄제실박물관의『제실박물관연보(昭和10年 1月~12月)』를 보면 1935년에는 경주 황남리, 보문리, 천북리 기타 경주 일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대량 구입한 건이 보이고 있다. 이 유물들은 한일협정 때 반환받은 모로가 히데오의 반출물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대부분은 모로가의 반출물로 보인다. 1936년에는 경주의 석탑 1기가 매각돼 부산으로 팔려갔다.
당시 법적으로는 하등의 제지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던 것이라 하는데 이후의 결과는 알 수 없고 석탑재가 어디에 소재하는 지는 미상이다. 1943년에는 경북도의 유림에서 제기(祭器) 1만4천점을 헌납한다. 1944년 오가와 게이키치가 1944년에 조선총독부를 퇴직하고 수집한 자료는 고스란히 일본으로 가져갔다. 1945년 해방후 경주분관장 오사카 긴타로는 일본으로 밀항해 중요한 자료를 몽땅 싸가지고 달아난다.
1945년 12월 경주분관 적산미술품 문화재 접수가 이뤄진다. 부산의 가시이 겐타로, 대구의 이치다 지로, 오구라 다케노스케 등의 소장품인 신라소, 불상, 회화 등 1천여 점을 뽑아 경주분관으로 옮기고 경주분관에 보관했다. 경주박물관으로 옮긴 것은 이들로부터 접수한 서화, 도자기, 금속품 등 총계 2623점이었다. 이것은 해방 직전 반출 접수 처리된 것으로 보인다.
-“반출전에 문화재 불법성 밝히기 위해선 그 반출 경로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
정규홍 위원은 오늘날 문화재 알리기와 반출 문화재의 환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나 반출 문화재의 환수에 있어서는 많은 숙제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반출 문화재의 불법성을 밝히는 것이 우선이고 이러한 불법성을 밝히기 위해선 그 반출 경로 파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했다.
“고미술품의 매매 과정에 대한 자료 수집과 일본이나 미국 등지의 고서점가나 도서관 등에 상당수 남아 있을 도록류의 수집은 그 경로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자료를 종합하는데 있습니다. 각 기관이나 단체 또는 개인들이 연구 조사한 내용을 종합해 반출문화재의 경로를 계속적으로 축적하는 종합자료(창고)가 필요한 것이지요. 각 유물에 대한 각종 조사를 하나의 목록에 계속적으로 축적해 대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