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으니, 출향한지도 이제 20년이 넘었다. 그 사이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있다. 그러는 사이 경주는 명절이나 큰일이 있을 때만 들르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경주사람’이다. 이번 여름에는 아이들과 함께 경주를 찾았다. 봉황대를 산책하기도 하고, 월정교·천마총·첨성대를 찾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개장했다는 화랑마을을 찾기도 했다. 천마총 앞에서 수도꼭지로 장난치며 놀던 기억, 밤에 아름답게 빛나는 월정교 아래가 너희 할머니가 빨래를 하던 곳이라는 얘기를 해 주지만, 아이들은 더운 날씨에 짜증내거나 딴청부리기 일쑤였다. 봉황대의 정취보다는 그 쪽 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 과일빙수를, 천마총의 신비한 이야기보다는 가판에서 파는 요상한 모양의 슬러시를, 첨성대가 들려주는 별 이야기보다는 보문단지 HICO의 VR 체험장을 더 좋아 했다. 화랑마을에 있는 화랑들을 보며 화랑의 기개를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좋았겠지만, 아이들은 달짝지근한 음료가 있는 카페에 더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문득, 이 아이들에게 경주는 ‘아빠 고향’이 아닌 다른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첫딸 출생신고 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때 주민센터 직원이 물었다. “등록기준지는 어디로 하실래요?” 가족관계등록부상 등록기준지를 현 주소와 부모 등록기준지 중에 선택할 수 있으니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주소는 바뀌어도 본적은 바뀌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던 내게 본적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 ‘본적’이란 말도 없어지고, ‘등록기준지’가 새로 생겼지···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갈등했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지만, 아이들은 서울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 지역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이력서에 본적을 서울로 적어 두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조금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모든 게 쉽게 변하는 요즘 세상에 본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니 ‘하나의 본적’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경주가 품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우리 가족의 본적은 모두 경주가 되었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 대학에 입학하니 선배들이 했던 말이다. 어디 국적뿐이랴. 요즘은 성도, 이름도, 그리고 성별도 바꿀 수 있는 세상이다.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대법원 규칙을 보니 등록기준지(본적)는 당사자가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 등록기준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경주라는 등록기준지는 지금의 나와 경주를 이어주는 몇 안 되는 끈이다.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내가 정해준 본적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본적이 ‘등록기준지’가 된 것처럼, 그리고 내 본적지에서 정겨운 이름 ‘황남동’이 사라지고 생소한 도로명 주소가 새로 생겼듯, 급변하는 세상은 등록기준지조차도 남겨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주 가끔씩이라도 경주라는 등록기준지를 보면서, ‘경주가 나와 전혀 관계없는 곳이 아니었구나’, ‘아빠는 왜 경주를 등록기준지로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딸들이 커 나가더라도, 세상이 변하더라도 본적(경주)이라는 고리로 아이들과 내가 연결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게 경주가 즐거운 추억이 가득 찬 곳이듯 아이들에게도 행복한 추억이 많은 곳이 되게끔 하자는 나 혼자만의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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