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월지’ 관련 기억을 퍼 올리면, 여름방학 한창인 이맘때가 떠오른다. 기역자 한옥 대문 양쪽으로 감나무 회나무 터를 다진, 마당꽃밭엔 사철나무 주위로 수국 모란 목단 국화 계절을 다투고, 죽담엔 맨드라미 채송화, 장독대귀퉁인 난초꽃 분꽃, 우물가 앵두나무 창포꽃, 흙담 밑엔 봉선화 담장 밖 즐비하게 줄선 해바라기 샛노랗게 해님 따라 숨바꼭질할 쯤, 국수방에 주문해 논 잔치국수 한 궤짝 짐자전거에 실려 배달 오면, 종손 맏며느리 솜씨 좋은 어머닌 바깥 연탄화덕 백철 솥에 우려낸 멸치다싯물 아지노모토(조미료)를 가미해 쌀을 넣고 적당이 퍼지면, 잔치국수를 확 풀어 감자 애호박 채썰고 정구지를 곁들여 느름국수를 하곤 했다. 별미라기보다는 흉년으로 뉘 집이던 꽁보리밥 먹던 시절이라 쌀밥이 귀했기 때문이리. 둘렛상(床)에 모여앉아 양푼 그득 느름국수에, 보리쌀 삶던 웃물 떠서 담근 맛깔스레 삭은 열무김치 수북이 점심상을 물리고 나면, 동네 개구쟁이 오빠또래들 대문 밖에서 불러대 기다렸다는 듯 뛰어가던 남자형제들,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 타고 아이스케키 장수 외쳐대면 구슬치기 딱지치기도 시들해져, 초등학교 고학년 바로 위 작은오빠 또래들은 검정고무신 첨벙첨벙 잠자리채 들고 안압지(동궁과 월지) 못가로 몰려갔다. 아스팔트 신작로 뿜어대는 열기를 풀쩍풀쩍 장난기로 받아치며 씩씩하게 연못가를 찾는 것이다. 유적지의 개념이라든가 문화재의 소중함도 홍보되지 않은 터라 자연수풀림에 방치된 월지는 어린이, 청소년, 어른 가리지 않고 즐기는 쉼의 놀이터였다. 보리밥 배불리 먹어도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활동량에 치여, 금방 배 꺼지는 옹골진 사내아이들, 해질녘 장날이면 아버지 삼천리호자전거에 싣고 오는 수박은 밤새 오줌쌀까봐, 꼭지 부분만 둥글게 오려내 황설탕 재워 장독대 두었다가, 식전 온 가족 빙 둘러앉아 더위 먹지 않는 비법인 양 달게 먹곤 했다. 해 긴 여름 간식꺼리도 수월찮았기에 우물가 빨갛게 익은 앵두나무 곁가지 잡아당겨 앵두를 따먹고, 샘물에 미숫가루 설탕물 개어 홀짝이던, 4남 1녀 양념딸 입이 짧은 내가, 찡그리며 뱉어내던 장독 귀퉁이 삭혀 둔 떫은 풋감, 고무다라이 둘러앉아 몽당 놋쇠숟가락으로 손바닥 벌겋게 껍질 긁어 삶은 자주감자 아린 맛도 유년시절 여름방학 추억으로 뎅그렁하다. 한창 해 달궈진 때 월지 못가로 몰려가서 물가 지천에 깔린 말밤도 따 까먹고, 곤충채집도 하다가 빈 깡통에 뭔가를 꿰차고 조심조심 뒤꼍마당으로 몰려든 장난꾸러기 오빠 또래들, 들키면 혼날까봐 쉬쉬 연탄불화덕에서 분주하게 눈치를 살피며 뭔가를 열심히 구워대고 있었다. 그 당시엔 아직 휘발유 곤로불도 없었고 아궁이 솔갑이나 장작으로 불을 때서 밥을 짓던 때지만, 개화기 교육받은 신여성 어머니는 신식물건 사용하길 주저 않았기에 우리집은 동네에서도 드물게 연탄화덕이 갖추어졌다. 고소한 연기에 끌려 뒤안깐으로 얼굴을 내미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쩔쩔매던 작은오빠 일행들. 천성이 재바르지 않고 순한 작은오빠는 부모님의 귀염을 독차지 하던 하나뿐인 누이를 살가워 하면서도 오늘 같이 분탕을 지기는 광경을 엄마한테 말해서 혼쭐날까봐 조바심을 쳤다. 대나무 문발 친 청마루, 엄마는 저녁밥 짓기 전 아버지 풀 먹인 모시바지적삼 손질하는 사이 무릎 베고 잠든 막냇동생 부채질 하다 살푼 선잠 들고, 폴폴 날리던 연기 잠자리채로 흩어내며 뜨건 살집 후후 불어 입맛 달게 먹어치우던 작은오빠와 그 친구들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잔뜩 겁먹은 듯 애원조로 참 맛있다고 한 입 권하는 먹거리, 나에게 먹이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치켜들고 있는 것은 징그러운 억머구리뒷다리 살점이었다. 내가 기겁하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대청마루 선잠 든 엄마가 잠깨 야단칠까봐 나보다 더 겁보로 놀라는 작은오빠와 그 일행들, 나를 구슬리고 얼르서라도 한입 먹여야 한 통속으로 뒷말이 없기에 억지로 삼키게 할 작정도 모의 한 것 같았다.. 진짜 맛있다며 먹여 주길래 눈을 감고 마지못해 뒷다리를 입에 넣어 어정어정 씹는 순간, 징그러운 생각은 간 곳 없고 연탄화덕에 갓 구워낸 그 부드럽고 고소한 맛에 오빠들과 한 통속이 되어버렸던 유년의 추억 속, 월지의 풍경은 남모르게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