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부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南川)은 문천(蚊川·汶川)으로도 불린다. 남천의 북쪽에는 신라의 월성과 야경이 아름다운 월정교 그리고 유학의 기틀인 향교가 자리하고, 남쪽에는 신라 시조의 오릉과 불국토의 남산 등 신라·고려·조선의 역사가 집약된 문화의 다양성이 공존한다.
월성 옆 최부자집에 놓인 연꽃 모양의 석조(石槽)가 월성 주변의 아무개 서당에서 옮겨왔다는 풍문을 듣고 서당 실체에 대한 궁금점이 일었고, 마침 19세기 중반 구미 선비 송달수는 경주를 찾아 그 소회를 읊조리고 「남유일기(南遊日記)」를 지으며, 이곳 문상서당에 대해 언급(『守宗齋集』卷9,「汶上書堂記」)했다. 즉 조선후기 문천 가 월성 주변에 서당이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우암선생의 6대손 송직규(宋直圭)의 아들 송흠학(宋欽學)은 연일정씨 정치환(鄭致煥)의 따님 사이에서 장남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순국지사 송병선(宋秉璿)의 부친 송면수(宋勉洙)·좌의정을 지낸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1818~1903)·훗날 송흠락(宋欽樂)에게 입양된 송진수(宋進洙) 등을 낳았다.
송달수는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으로, 이세연·윤필현·조병덕 등과 교유했고, 벼슬은 경연관·사헌부 지평·장령을 거쳐 부호군을 역임하고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율곡의 학설을 따랐고, 인물동성(人物同性)을 주장하는 낙론(洛論)을 지지했으며, 1855년 우암을 비난한 내용이 수록된 조하망의 「서주집(西州集)」을 간행한 조석우에 대해 관직추탈의 처벌을 주장하며 송시열(宋時烈)-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을 이었다. 마침 그의 동생인 송근수가 경주부윤으로 재직(1855.12~1857.5) 중이었고, 평소에 경주에 대한 동경과 체직되는 아우를 위로하기 위해 1857년 늦봄 3월27일부터 5월29일, 총 64일간(竹峯-馬谷-山羊-新安-金井店-龜尾-百安-永川-乾川-慶州-玉山-永川-大邱-河濱-伽倻山-嘉周-居昌府-茂朱-집) 유람했고, 그 가운데 4월19일부터 5월20일, 총 32일간(鳳凰臺,玉笛,南門樓,仁山書院,瞻星臺,半月城,鷄林,蘿井,五陵,金庾信墓,上書庄,芬皇寺,雁鴨池,瓢巖) 경주의 시가지와 옥산서원·인산서원을 위주로 여정을 잡았다.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남유일기」를 남겼으며, 경주부 월성 주변에 문상서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지역자료가 되는 등 경주를 소개하는 문화보고서의 성격을 갖는다. 또한 노론계 서원인 인산서원 그리고 옥산서원과 회재선생의 후손인 용궁현감 이종상을 만나 깊은 담소를 나누며 학문의 도통연원을 확인했다.
문상서당기(汶上書堂記) 선왕의 옛 제도에 준수한 백성들 가운데 나이가 15세가 되면 대학에 들어가는데, 이는 인재를 널리 뽑는 이유였다. 대개 그 구분을 말하자면 신분 귀천의 분별이 있었으나, 그 성품이 좋고 나쁨의 차이는 없었다. 귀하다고 반드시 어질지는 않고, 천하다고 반드시 어리석지는 않았으니, 어찌 귀천을 별개의 것으로 인품을 논정(論定)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주가(周家)의 고상한 예법만을 숭상해, 비천함에 처하면 준마[良驥]라도 잘 달리지 못하고, 값진 옥도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거업(擧業)을 모두 스스로 포기하고 하류를 달갑게 여긴다. 또 혹은 스스로 갈고닦음을 조금 알고 그 소유함이 좁아서 분수를 잊고 지나치게 하는 자가 많으니 애석하고 개탄스럽다. 하물며 사람이 훌륭한 사람되는 이유가 인도(人道)를 다함에 달려있거늘 어찌 전력을 다하지 않고 스스로 그만두려 하는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도를 알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독서를 통해 그것을 구하여야 하니, 한유(韓愈)가 공부하러 가는 자식에게 준 권학시(勸學詩)에 이른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가슴 속에 시서(詩書)가 있어서이다(人之能爲人 由腹有詩書)”가 이것이다. 동도의 형승(形勝)은 조선에서 빼어나고, 영남에서도 첫 번째이다. 지세는 넓고 산천은 서로 빛나며, 그 빼어난 정기를 받은 자 가운데 준수하고 빼어난 무리가 있었으니, 만약 선왕의 세상에 뽑혀서 태학에 들어갔다면 장차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나는 동도에 이르러 인산서원(仁山書院)을 첨알하고, 월성의 옛터를 찾았는데, 서당 하나가 문천 가에 있었다. 전하기에 이곳 경주부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건립해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고 했다. 나는 듣고서 매우 가상히 여기어 감탄했다. 며칠 후에 인산서원 원생 원병규(元炳奎)가 찾아와 제액(題額)과 기문(記文)을 청하였기에, 나는 졸렬함을 잊고 마음 가는 대로 글을 적었다. 거듭 몇 줄의 글로, 이 서당 주인에게 알리노라.
숭정 4번째 정사년(1857) 5월 여름. 석양거사(石陽居士) 민락당(民樂堂)으로 가는 도중에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