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맛집,「금산재」의 칼 국수집 송화산 김유신 장군묘에 오르면 건너편에 형산강(서천)이 흐르고, 바로 아래 숭무전과 장군의 재실인 금산재(金山齋)로 이어진다. 이곳 별채에서 칼국수와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어 ‘금산재 칼 국수집’으로도 소문나 있다. 5년여 만에 와보니. 칼국수만 팔던 집이 콩국수, 삽겹살 등 메뉴 수가 불어 나있고, 상추, 고추 등을 가꾸던 마당에는 잔디밭에 야외 테이블도 놓여있다. 세월이 꽤 흘렀어도 칼국수 맛은 그대로이다. 시골집 잔치 국수 같은 추억의 맛이며, 굴다리 기찻길로 덜커덩거리며 지나는 기차소리, 그리고 식당 뒤에「송화방지」란 표지석도 그대로 서있어 더욱 친근해진다. 아마도 이런 고향의 맛과 소리, 그리고 그리움이 남아있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지도 모른다. ▼「송화방지(松花坊址)」 비석이야기 식당뒤편 언덕에 「송화방지(松花坊址)」라고 적힌 까만 표지석 이 있다. 삼국유사 기이편 「김유신조」에 의하면 ‘김유신 댁 재매부인이 죽으니, 청연 산곡에 장사지내고, 재매곡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오면 집안사람들이 이 골짜기에 모여 잔치를 벌였다. 예쁜 꽃들이 만발하고, 송화(松花)가 가득한 아름다운 골짜기라, 여기에 「송화방(松花坊)」이란 암자를 짓고, 가문의 소원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특히 이곳은 그의 아내인 지소부인이 훗날 출가하해 거처한 암자로 잘 알려져 있다. 부인은 신라 29대 무열왕과 문명왕후(문희)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 김유신 장군이 외삼촌이자 또한 남편이다. 이 부인에게는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여인의 정도(正道)를 지켜 살아야했던 가슴 아픈 사연이 전해온다. 부인에게는 원술(元述)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다섯 아들 중 둘째로 장래가 가장 촉망돼 어릴 때부터 귀여워했다. 후에 화랑이 되고, 상장군의 장수가 됐다. 문무왕 12년(672)에 원술은 당나라 군사와 평양성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했다.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 적의 반격작전에 말려 크게 패함으로써, 많은 병력을 잃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조정에서는 이 패전의 책임을 묻는 어전회의가 열려, 왕이 김유신에게 의견을 묻게 되고, 장군은 태대각간으로서 아들에 대한 엄벌을 간청하게 된다. 결국 왕의 은전(恩典)으로 죄를 용서 받긴 했으나, 원술은 화랑오계를 어긴 불충, 불효자로 아버지에게서 끝내 용서받지 못하고 부자간 인연까지 끊어지는 설움을 격어야 했다.▼지소부인의 삼종지도(三從之道)와 비구니 스님이듬해 7월, 김유신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원술은 귀가해 어머니를 만나려 했다. 그러나 지소부인은 서릿발같이 냉엄한 자세로 “나도 여자로서 삼종지도가 있거늘, 남편이 죽은 지금은 자식을 따르는 게 순리이나, 너는 자식의 소임을 다하지 못해 가문에서 쫓겨난 몸, 내가 어찌 네 어미가 되어 너를 집안으로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하고, 부인은 원술을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는 당나라 군사와의 매소성 전투(문무왕 15년)에 참전해 선봉에서 무공을 세우면서, 지난 패전의 굴욕을 말끔히 씻었다. 조정으로부터 훈공과 높은 벼슬을 받고,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간청했으나, 한번 가문을 더럽힌 죄 용서할 수 없다면서, 아들과의 상면을 끝내 거절했다. 신라최고 권력자(태대각간) 부인지만 삼종지도 중 남편과 가문을 따르기 위해, 자식을 포기하는 쓸쓸한 노년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아마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매정하게 떠나보내면서, 한없이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 후 부인은 암자로 들어가 부처님께 귀의했으니, 이절이 바로 「송화방松花坊」」이라고 한다. 거기서 비구니 스님으로 자식에 대한 매정한 모정에 용서를 구하며, 또한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명복과 나라의 장래를 빌면서, 외로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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