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티로 가던 장꾼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과거 문교부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석학 황산덕 선생의 명저 『복귀』에서 한민족은 절대로 절멸(絶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임진왜란을 예로 들면서 이 나라는 위기를 맞으면 큰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나왔는데 그것은 우리 민족이 그런 저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을 되돌아보면 그 말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난을 전후하여 장수로는 이순신, 권율이 있었고, 정치인으로는 유성룡, 이덕형, 이항복이 있었으며 종교 지도자로는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있었다.
지금 일본과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졌다. 어쩌면 나라 전체가 휘청일 것 같다.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임진왜란 때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그런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집에만 있어서는 불안한 마음이 진정될 것 같지 않다. 승용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휴가철이지만 이른 시각이라 통행하는 차량이 별로 없다. 불국사를 지나 석굴암을 향하여 올라가면 석굴암과 양북면 장항리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우측 양북 방향으로 2km쯤 내려가면 다시 갈림길이 있다. 우측으로는 경주 풍력발전이다. 좌측으로 계속 3.1km 가면 우측에 있는 토함산자연휴양림 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계속 좌측 길로 4.6km 더 내려가면 장항리사지 표지판이 보인다.
길가에 차량 7-8대를 주차할 수 있는 간이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른 시각이라 텅 비어 있다. 유홍준에 의하면 국립경주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소불 정양모 선생은 ‘경주를 말해주는 세 가지 유물’ 중의 하나로 이 장항리 폐사지를 들고 있다. 그러나 막상 절터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쌍탑과 불상 좌대만 남아 있는데 절터가 깊은 계곡에 바짝 다가서 있어 큰물이라도 지면 골짜기 속으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실제 서탑은 언젠가 큰물이 덮쳐 탑이 그대로 골짜기 속으로 무너져 내린 적이 있었다.
장항리사지가 있는 이곳은 양북면 장항리 탑정마을이다. ‘장항’은 한자로 ‘노루 장(獐)’에 ‘목 항(項)’이다. 마을의 앞산 지형이 마치 노루의 목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역에서는 ‘노루목’ 또는 ‘노루미기’라고 한다. 탑이 있어 마을 이름은 ‘탑정(塔亭)’ 혹은 ‘탑지이’이다.
신작로가 나기 전 이곳은 감포 쪽에서 진티(진현동)로 가는 동산재를 넘기 전 쉬어 가는 길목이다. 감포에서 진티 장으로 가던 장꾼들이 새벽에 길을 떠나 이쯤에 이르면 날이 밝아 오고 길목에 있는 이 절에 들러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고 또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십사고 부처님께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계곡에 흐르는 물을 마시며 한숨을 돌리고 조금은 가벼워진 짐을 추슬러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첫 새벽 감포 쪽에서 어물(魚物)을 머리에 이고 또는 등에 지고 이 산등성이를 오르던 이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돌계단을 내려가서 계곡 위 나무로 만든 아치형 다리를 건너 제법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오르면 탑 2기와 불상대좌 1기만 남아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앞으로는 낭떠러지이고 뒤로는 산이 아늑하게 에워싸고 있다. 속세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절은 작으나마 화려했을 것이다. 절 이름이 전하지 않아 지명을 따서 장항리에 있는 절이라 하여 ‘장항사’, 혹은 탑정마을에 있다고 해서 ‘탑정사’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확실한 이름은 알 수 없다. 현재 사적 제45호 장항리 사지로 지정되어 있다.
탑 주위에는 개망초가 그득하다. 이 풀은 망초에 ‘개’ 자를 더한 것인데, 지역에 따라서는 ‘왜풀’이라고도 한다. 그 이름을 통해서도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귀화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가 망할 무렵 나타났다고 해서 망할 ‘亡’ 자를 넣어 개망초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일본과의 갈등을 생각할 때 죄다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