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나는 고양이가 무섭다. 개도 무섭지만 고양이는 정말 무섭다. 노려보는 그 눈도 그렇지만 소리 없이 따라오거나 지나가는 모양이 참 섬찟하다. 밤마다 부른 배를 좀 어떻게 해보려고 공원에 산책을 나가면 주변에 고양이가 없나 둘러보느라 목 운동만 열심이다. 나의 이런 행동은 사실 충분한 근거가 있다. 원래 인간은 고양잇과를 피하도록 되어 있다. 고양잇과의 대표주자는 당연히 사자다. 산모의 진통이 주로 한밤중에 시작하는 것은 사자가 먹이 활동을 하는 새벽이나 저녁 무렵을 피해 출산했던 시절의 흔적이라고 한다. 반면에 고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은 특히 그 얼굴에 열광한다고 한다. 코나 발바닥 등 어딘들 안 예쁠까 싶지만 말이다. 고양이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면 떠오르는 동물이 있다. 쉬이 예상할 수 있듯 사자 얼굴이다. 고양이 얼굴도 그렇지만 뭔가 잡으려고 앞발을 날렵하게 내밀거나 휘두르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자의 그것이다. 그러니 안 무서울 수가 있겠는가! 이처럼 고양이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지구 상에 20% 이상이란다. 고양이를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부류다. 여기에 나도 끼어 있다. 아무리 친해지려 노력해도 안 된다. 안 되는 건 정말 안 되는 거다. 사자랑 친한 인간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릴 적 기억도 한몫한다. 한때 거친 세로줄로 짠 실크 벽지가 유행한 적 있다. 없는 살림에 마련한 비싼 벽지인지라 잘 마르라고 문을 활짝 열어뒀더니 언제 들어왔는지 옆집 고양이가 온 방을 휘젓고 다니며 벽지란 벽지를 다 망쳐놓은 거다. 벽지 한 올 한 올 선명했던 그 난폭함에 내 부모님은 그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그들도 나처럼 20%에 해당하는 부류다. “할머니, 제발 고양이 좀 치워줘요!!” 그날 온 가족의 절규는 내 몸 어디엔가 공포로 남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자의 모습을 감춘 고양이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6억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심각하다. 80%의 사람들은 환영할지 모르지만 20%의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다. 이 숫자는 인간의 사랑을 더 받지 못해 안달하는 개보다 3배가 많은 숫자란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개는 진화 과정을 통해 매우 효과적으로 가축화되어 왔다. 인간에게 잘 보이려고 신체는 극적으로 변화해 왔다. 귀가 밑으로 처진다거나 반대로 꼬리는 위로 말려 올라가는 것이 그 좋은 증거다. 명백한 가축화의 특징이다. 고양이는 어떨까? 오히려 귀를 빳빳이 세우고 다닌다. 마치 맹수처럼 싸우자고 덤벼들 자세다. 가축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전개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개처럼 처진 귀와 살랑대는 꼬리로 인간의 이목을 집중해야만 가축화라고 할 수는 없다지만 도도한 고양이는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다. 그나마 타협한 부분이 작아진 뇌란다. 구체적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관장하는 부분이 작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나름 주인의 발목에 몸을 비비거나 얼굴을 핥는 서비스를 하는, 아니 해주는 것이다. (까칠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아주 먼 옛날,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인간들은 필요에 의해 개와 소를 가축으로 선택했다. 인간이 그들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 고양이는? 아기처럼 귀여운 얼굴을 한, 그러나 그 속에 까칠한 성깔은 숨긴 채 고양이는 스스로 인간에게 접근한 케이스다. 인간과 가축이 함께 만들어가는 역사에서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다. 고양이의 아기처럼 귀여운 외모는 사람을 기분을 좋게 만든다. 아기의 웃는 모습에 반응하지 않는 성인이 없듯이 고양이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옥시토신을 분비하게 하는 외모적 특성을 가진다. 동그란 얼굴, 통통한 볼, 큰 눈망울, 앙증맞은 코 등등. 그럼 뭐하나? 고양이랑 산책 나온 사람 여태 본 적 없다. 개를 키우는 사람은 걷기 운동을 할 확률이 보통사람보다 64%나 높은데 반해,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오히려 9%가 낮다고 한다. 또 고양이는 먹이를 줄 때만 주인에게 주목한다. 고양이한테 잘 보이려는 주인은 이런 재미를 못 잊어 먹이를 더 자주 주다 보니 오늘날 고양이 대부분이 비만이란다. 이래저래 재미난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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