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문무왕(660∼681), 통일을 기반으로 나라안팎 기상과 용맹이 넘치고, 평화의 나팔소리 백성들로 하여금 희망을 품어, 예지의 심미안(審美眼)으로 철학과 종교, 향가 음악 미술 건축 등 종합예술이 꽃피던 시기 조성된, 통일신라 찬란한 궁궐의 정원 월지!  7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기 손색없는 조경기법, 석축기술로 정원문화의 원형을 역사서에 펼치는 월지 기록을 따라가면,【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與地勝覽】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다.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 터가 있는데, 주추와 섬돌이 아직도 밭고랑 사이에 남아 있다. (중종 25년 1530년 기사)【동경잡기:東京雜記】 천주사의 북쪽에 있다.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십이봉을 본떴으며, 꽃을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이 있었다. 어느 때에 창건했는지는 모르나 애장왕 5년(804) 갑신(甲申)에 중수하였는데 그 터의 주초와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1669년 기사) 동서190m 남북 190m 장방형, 면적은 약 1만 5658평방m(4738평) 규모의 인공 연못이다. 3개의 섬이 조성된 호안석축 길이는 1285m, 건물의 배치는 직선으로 서쪽과 남쪽에 두었다. 다듬은 돌로 쌓은 못가 호안은 절묘한 곡선과 직선 자연과 인공을 조화롭게 굴곡지어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게 설계되었다. 궁궐 정원의 연못이지만 발해만 동쪽에 있다고 하는 삼선도(三仙島), 봉래도, 방장도, 영주도 3개의 섬을 연상하며 방대한 느낌으로 조성했다는 견해다. 동쪽과 북쪽 호안은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 나지막한 언덕이 펼쳐져 있는데, 높이는 3m∼6m 선녀들이 사는 무릉도원을 상징한다. 동양의 도가(道家)는 한나라 초(BC206∼AD8) 장생(長生)을 추구하고 마침내 모든 육체의 불사(不死)를 구하는 것이 구심점이었다. 그 시대 제왕은 궁 안에 못을 파고 동해의 신선이 산다는 영주·봉래·방장 3섬을 만들어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갈망한 것이다. 문화의 흐름을 감지한 신라도 신선사상인 삼신산과 무산십이봉을 축소한 배경으로 지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 옛날 달빛 휘영청 얼비친 연못 누각에 앉아, 처연히 신선된 경지에 다달았을 왕족, 신하들과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사기충전과 나라의 국익을 도모하고, 삶을 재충전하는 피안의 세계로 아름다웠을 달못 풍경, 월지. 1974년 경주종합개발 계획에 의거 준설에서 유물 발굴조사로 75년 76년 건물터 26동 담장터 8개소, 배수로 시설 2개소, 입수부 1개소, 등이 확인되고, 금동초심지가위, 금동보살좌상, 금동삼존판불, 토제풍로, 목선, 납석 사자향료 뚜껑, 칠기연화장식, 목제건축부재, 화려하고 다양한 기와류, 당시의 문자가 씌여진 목간, 특히 문자가 새겨져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목제류와 칠기 토기류 등 금속공예품 1152점, 목제품 920점, 철제품 603점, 기와류 2만 4353점, 토기류 3388점, 기타 2171점, 유물이 출토 되었다. 제3건물지로부터 동쪽으로 1.1m정도 떨어진 연못 깊이 뻘층에서 출토된 금동가위는, 호롱불 심지를 자르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잘린 심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으며, 봉황의 꼬리모양 손잡이에 방울무늬(魚子文)와 당초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일본 정천원에 소장 된 가위 형태와 흡사해 양국 간 이어진 문화교류를 실감하게 한다. 연못 서쪽 호안에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 3개를 1980년도 복원했고, 2곳은 초석을 복원 노출시켜 놓았다. 남·동·북쪽의 호안 보다 서쪽 호안이 좀 더 높은 위치인데, 이는 못가의 누각에 앉아 연못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게 설계한 구조다. 수심은 1.8m 정도로 추정되며 바닥에는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깔고, 못 가운데 사각형의 나무귀틀을 놓아 연뿌리가 퍼져나가지 않도록 신경을 쓴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입수부와 배수부는 중요한 시설물인데 시(市) 북천(北川) 물을 끌어당겨 설치한 동남쪽 귀퉁이 입수부는 구조상 완층구조→수직낙화→연못 안 세 개의 섬을 돌아→동북쪽 배수부로 출수(나무로 된 마개로 출수구 구멍 수위조절) 되는 정화기능 시공법 구조로 연결돼 있다. 출토유물 중 바닥의 뻘 속에 묻혔다가 발굴된 길이 6.2m, 넓이 1.1m, 깊이 60m 소나무통속 가운데를 파서 만든 목선(木船)은 못의 동쪽 반도처럼 돌출된 호안석축 바로 앞 전복되어 있는 상태에서 진흙 뻘 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천년을 썩지 않고 보존되었던 것이다. 참나무로 만든 비녀장 형태의 막대기를 배 안쪽 바닥 앞뒤에 하나씩 가로 질러서 조립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견된 배로서는 가장 오래된 월지 배, 당시 왕족 뱃놀이 쓰임새로 이용했을 놀잇배 역할로서는 폭이 좁아 불편하기에 연못 청소용으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경주대학교 조경학과 최재영교수 견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