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효자동 유래와 「효자리 학생 전희 비」이야기 강동면에서 「유강터널」을 벗어나면, 바로 포항 효자동에 이른다. 포항 초입 형산강변에 많은 아파트군, 포항공대와 포스코주택단지, 그리고 효자 시장이 주변에 있어, 꽤 붐비는 포항 신흥 도시지역이다. 이곳 효자초등학교 후방 50여미터 지점에 효자 어린이 공원이 있고, 그 안쪽에 「효자리 학생 전희(孝子里 學生 田禧)」라는 긴 비석이 우뚝 서있다.
조선시대 이 마을의 전신인 연일면 임강촌에 「전희」라는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있었다. 학문이 깊고, 덕행이 뛰어나 일명 효공거사(孝公居士)라고 불렀다고한다. 그가 소년시절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이나 영위를 모시고, 조석으로 호곡을 끊이질 않았다. 이 갸륵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어느 날부터 호랑이가 밤마다 나타나 여막 앞을 지키며 그의 신변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모친이 떠난 후에도 시묘3년에 호곡을 이어가니, 역시 범이 이를 지켜주며 소년을 보호했다고 한다. 이 효자의 지극 효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경상감사가 효자 상을 내렸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조정에서 효자비가 사액되었다고 한다.
비석 높이는 2미터 정도 화강석이며, 효자비각이 있었다고 전하나, 긴 세월 속에 간데없다. 야산 솔밭에 비(碑)만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76년 10월에 효자초등학교로 이전했다가, 효자토지구획사업으로 인해 14년 전 이곳으로 다시 옮겨 세웠다고 적혀있다. 그가 살던 마을은 당초 버들골 또는 유동이라고 했는데, 마을 앞으로 흐르는 형산강 뚝 따라 땅버들이 길게 우거진 멋진 동네로, 효자각을 정려 받은 후에는 효자리(孝子里)로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형산강이 보이는「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로,「전희」선비와 같이 훌륭한 학자와 그 후학들의 학풍이 배어있어 그런지, 연일향교가 자리해 있었고, 현재는 포항공대, 포항제철학교들이 형산강을 바라보고 자리 잡고 있어, 포항의 선진 면학동네로 일컬어지고 있다.▼포항 칠성천의 효·불효교 이야기 옛날 형산강 지류인 칠성천이 있던 강변 어느 마을에 홀어머니와 한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밤늦게 아들이 잠든 틈을 타서 밤마실을 다니곤 했는데, 그 횟수가 한 달에 한번쯤에서 나중에는 거의 매일 밤으로 잦아졌다. 건너 마을 남자를 만나러 다닌 것이다. 어느 동짓달 날 아들은 밤이 이슥해지자, 몰래 집을 빠져 나가는 어머니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그녀 뒤를 미행 하였다, 그녀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개울물을 건너 어느 홀 애비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그릇된 행동을 목격한 아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으나 아버지 돌아가시고 외롭게 살아가는 어머니를 이해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 어두운 밤에 강을 건너는 어머니를 위해 징검다리를 놓아드리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밤에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남몰래 일곱 개의 크고 넓적한 바위로 열심히 다리를 놓았다.
그 후 사람들이 이를 알게 되어, 연일 현감에게 고하여 아들의 행위가 효(孝)냐?, 불효(不孝)냐?, 어느 쪽에 해당하는 가를 가려주도록 청했다. 현감은 고심 끝에 ‘동온하정(冬溫夏凊)-겨울은 따뜻하게, 여름은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이 부모에 대한 도리-이라, 죽은 아비는 죽은 대로, 산 어미는 산자의 소망대로 해주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는 명(名) 판결을 내려 아들에게 효자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다리는 일곱 개의 돌로 만든 다리인 ‘칠성교’라고 불렀으나, 어미 편에 선 사람들은 ‘효자교’로, 아비 편에 선 사람들은 ‘불효교’로 마을사람들끼리 암암리에 호칭을 달리하곤 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심전심, 자연적으로 통합되어 효·불효교(孝不孝橋)로 불러졌다고 한다. 칠성천은 시내를 돌아 죽도시장과 동빈 내항 쪽으로 흘러내렸고, 칠성교 자리는 남빈동 사거리 어느 근방이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모두 도시 개발 및 죽도시장현대화로 복개되어 지하로 숨었고, 많은 차량과 사람들만 붐비고 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