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솥 곁에서 -古代
장석남
부엌문이 열리고 솥을 여는 소리 누굴까? 이내 천천히 솥뚜껑을 밀어 닫는 소리 벽 안에서 가랑잎 숨을 쉬며 누워 누군가? 하고 부를 수 없는 어미는 솥뚜껑이열리고닫히는사이에크고도 깊은 쓸쓸한 나라를 세웠으니 국경처럼 섰는 소년이여아직 솥을 닫고 그 자리에 섰는 소년이여 벽 안의 엄마를 공손히 바라보던 허기여 그립고 그렇지 않은 소년이여 팔을 들어 두 눈을 훔치라
-아프지만 그리운 가난한 시절에 대한 기억
집안의 기둥인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부재하고 “가랑잎 숨을 쉬며 누워 있는” 어머니만 남아 있는 집이다. 그 어머니는 활동의 기능을 상실한 존재다. 부엌으로 소년이 들어온다. 허기를 참지 못한 소년이, 없을 것을 알지만 혹시나 하고 솥을 연다. 누굴까? 그 소리를 생명의 기미가 거의 없는 어머니는 엿듣고 있다. 다시 닫히는 소리. 빈 솥은 궁색한 집안 풍경을 환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먹을 것을 챙겨주지 못하는, 앓는 어머니는 누가 왔는지를 묻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의 집을 짓다 못해 “크고도 깊은 쓸쓸한 나라”를 세운다. 어린 것이 배를 곯았을 생각과 장래까지가 떠올라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쓸쓸함이 압도하는 상황이다. 그 마음을 헤아리는 소년은 밖으로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는 형국에 있다. 시인은 그 지점을 ‘국경’이라는 신선한 용어로 처리한다. 그 가난의 자리에서 벽 -옛집의 부엌과 방은 대체로 벽으로 막혀 있다- 안의 엄마를 공손히 바라보면서 소년은 소리 없이 허기를 참고 섰다. 이 시는 성인 화자의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성인 화자, 지금의 ‘나’가 그 시절의 “그립고 그립지 않은 소년”, 어린 시절의 ‘나’를 돌아본다. 그러면서 “팔을 들어 두 눈을 훔치”라 한다. 애늙은이처럼 눈물도 흘리지 않은 자신과, 어머니를 품어 안지 못한 자신을 다 돌아본다. 떠올리기도 싫은 가난한 시절이 왜 자꾸 그리워지는 걸가? 그 시절이 우리 마음 속의 영원한 ‘고대(古代)’이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