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더욱 자랑스럽고 보배로운 동네가 바로 경주양동마을이다.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500년 전통을 간직한 유서깊은 반촌마을이다. 지난 8일, 화려하지만 피상적인 수식어 보다는 자긍심과 품위를 유지하며 소소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양동마을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마을을 들어서자마자 연꽃과 수련을 분양한다는 연밭 너머로 비탈진 구릉에 반가와 초가가 조화롭게 섞여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최근 관가정은 비가 새고 손상된 부분이 많아 전격 보수에 들어가 가림막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향단 및 몇몇 문화재는 개방하지 않아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관광객은 꾸준히 찾는 편이었다. 전통과 역사가 주민과 함께 호흡해서일까. 정형화된 민속마을의 공허함보다는 활기와 온기가 넘쳤다. 지나온 500년과 함께 앞으로의 500년을 향해 가꾸며 보듬고 살고있는 주민들의 표정은 밝고 친절했다.
이 마을은 전체적으로 하촌, 물봉골, 내곡, 거림의 4골짜기와 물봉동산,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거쳐 넘어가면 나타나는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돼 있다. 마을 도로는 양동마을길과 양동마을안길로 이뤄져 있다.
마을 곳곳 골목마다에는 문화재 안내판과 이정표가 마을길을 잘 안내하고 있었다. 7월 초입, 소서가 지난 양동마을은 여름꽃들과 초록이 짙어가고 있었다. 대부분 마당에는 작은 정원과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선 진한 토속적 서정이 물씬했다. 초가집 텃밭에 심어둔 옥수수에서, 흐드러진 키 큰 접시꽃에서, 고택 뒤뜰의 오랜 장독대에서, 컹컹 짖어대거나 까무룩 졸고 있는 강아지들이 그랬다.
초가의 흙담, 산등성이 황토길, 담 너머로 핀 능소화와 백일홍, 원추리의 주황색 유혹, 짓붉게 피어난 칸나, 접시꽃, 백합, 수국 등의 여름꽃도 한창이었는데 500년 역사마을을 한층 화사하게 장식해 주었다. 그렇게 조화로울 수가 없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어서 오르막길 고택을 걸을때면 어김없이 헉헉댔다. 선조들은 이 길과 골목을 수없이 오갔을터인데...,
-양동마을은 전통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 지닌 대표적 반촌으로 종가일수록 높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 집 배열해 양동마을은 1984년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됐고 2010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마을이다. 양동마을은 전통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지닌 대표적 반촌이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다양한 건축물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로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고문헌과 예술 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 외 민속마을의 전통이 오랜 세월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다.
양동마을은 또한 유수한 문화재들을 다수 보존하고 있다. 국보 1점, 보물 4건, 국가지정 문화재 등 유무형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것. 국보는 1점 통감속편(283호)을 비롯해 보물 4점으로는 무첨당, 향단, 관가정, 손소영정이며 중요민속자료 12점으로는 서백당, 낙선당, 사호당, 상춘헌, 근암고택, 두곡고택, 수졸당 이향정, 수운정, 심수정, 안락정, 강학당이다.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7점으로는 유형문화재로서 적개공신논상록권 손소선생분재기가 있고 기념물로서 양동의 향나무가 있으며 민속자료로 대성헌이, 문화재자료로 손종로정충비각이 있으며 향토문화재로 경산서당과 두곡영당이 있다.
-다양한 방면에서 즐기는 양동마을...조선 청백리의 기상과 조선시대로의 문화기행 양동마을은 대략 6개 방면에서 즐길 수 있다. 먼저, 하촌방면에서는 양동마을 입구에서 떠나는 조선시대로의 문화기행을, 물봉골 방면에선 한눈에 들어오는 양동마을의 규모와 마을의 고즈넉한 정취를 만날 수 있다. 수졸당 방면에서는 그림같은 가옥들이 주는 옛스러움을 감상할 수 있고 내곡방면에서는 독특한 구조의 가옥들을 만날 수 있다. 두곡방면에선 두곡 이조원 공과 그 후손들의 숨결을 느낄수 있다. 향단 방면에서는 곳곳마다 서려있는 조선 청백리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양동마을 대표 가옥인 서백당, 무첨당, 향단, 관가정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온고지신’...현재를 호흡하며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해, 고택에서의 별 헤는 하룻밤! 묵어보시라. 양동마을은 어제에 머물지 않는다. 전통음식, 전통놀이, 역사마을활용 프로그램 등의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가하면, 심수정에선 매주 ‘풍류가 피어나는 음악회’도 열린다(양동마을운영위원회 후원). 민박할 수 있는 고택도 많다. 대부분 주민이 살고 있는 가옥의 사랑채나 별채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갈곡정, 갈구덕초가집, 낙원별방, 매산고택, 물봉동산황토방, 소쇄당, 유연제, 해저고택 등에서 연중 운영중이다.
마을 특산물로는 양동조청, 약과, 청주, 유과, 장, 쌀엿, 식혜와 수정과 등을 직접 제조 판매한다. 그러고보니, 한과나 유과를 제조하거나 된장, 간장, 연꽃 수련을 분양한다는 안내도 볼 수 있었다. 천연샴푸와 조청을 판매한다는 집도 있다. 현직 국무총리가 방문한 맛집이라는 커피집도 보였다. 이 마을을 찾은 한 관광객은 식음료를 맛보는 공간과 휴게 공간이 다소 부족하다면서 적정한 조율이 이뤄져 늘어나길 바라기도 했다.
100년이 넘은 양동점방은 1900년 생겼다고 한다. 양동초등학교 개교와 함께 문방구점으로 문을 열었다고. 현재 주인은 1970년부터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시류에 편승해 가게를 더 확장할 수도 있을테지만 늘 소박한 점방 그대로다. 점방 한켠, ‘양동벅스’라 명명하고 커피류와 음료를 파는 모습에선 빙그레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볼 즈음 들른 ‘만호 커피집’에서 시원한 수박쥬스를 마셨다. 현재는 마을 협의를 거쳐 숙박업, 카페, 음식점이 들어섰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다. 방문객들이 먹거리를 찾는 것에 비해선 부족한 편이라고. 카페는 작은 슈퍼에서 커피를 파는 것을 포함해 서 너 곳 뿐이다.
-오르고 내리고 또 오르기를 반복하는 골목, “우리집에 들어오고 기웃거려도 이젠 예사로 생각합니다” 여러 갈래의 길과 골목으로 오르고 내려오다보니 한 나절 이상이 걸렸다. 특히 유명 고택과 가옥들은 정상 부분에 집중돼 있어서 오르고 내리는가 하면 또 오르기를 반복했다. 이 마을에서도 골목에선 주로 어르신들을 만난다. 한 어르신은 “우리집에도 들어오고 기웃거려도 이젠 예사로 생각합니다. 별로 개의치 않아요”라며 웃는다. “가옥 매매는 되고 있지만 활발하지는 않아요. 주인이 살지 않는 집도 있어요. 전세로 두거나 세를 주지요”라고 말한다. 여느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한 길목에서 양동마을 전체의 문화재관리를 하는 두 어르신을 만났다. 양동마을 전체의 주요 목조건물의 화재예방과 감시 순찰경비를 하는 이들은 365일 지속적으로 이 마을을 관리한다. 이들은 관광객이 다니는 길가 잡초도 제거해 양동마을을 더욱 쾌적하고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껏 500년을 이어왔으니 앞으로 500년도 이어가야하지요” 멸실가옥 복원 이뤄진 경우 아직 없어서 실질적인 지원 방안 필요해 텃밭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 마을 주민을 만났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는 외지생활을 하다가 다시 고향인 양동마을로 돌아왔다고 했다. ‘이씨’ 라고만 밝힌 그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지정 이전이나 이후에도 주민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씨는 “실제로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기는 힘들겁니다. 이씨나 손씨 성이 모여사는 이 동네에 융화돼 살기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타성씨가 들어와서 산다면 이 마을의 정체성에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라고 했다.
“우리마을엔 최소 150년에서 600년 된 집들이 대부분이지요. 보다시피 능선의 7부나 8부에 큰집들이 있습니다. 서백당, 무첨당, 향단, 관가정도 바로 이것에 연유하고요. 머슴이나 종들이 살던 집들은 그 아래 위치합니다. 한 동네에 정자가 10개 넘는 동네는 없습니다. 우리 마을은 정자류가 13개소이고 불천위가 세분(손소 선생, 이언적 선생, 손종로 선생)이나 계십니다 이 동네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 중 70~80명이 현직 대학교수라고 해요”
큰집 아래 집들 중 집이 허물어지고 난 뒤에는 지금은 텃밭이 돼 있는 곳이 많다고 한다. 방치할 수 없으니까 텃밭으로나마 가꾸는 것. 이씨가 가꾸고 있는 텃밭도 예전엔 집터였다고 한다. 멸실 가옥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그는 70~80년대의 멸실가옥도 복원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멸실가옥의 명확한 증명 자료를 구비해야해서 실상은 복원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유네스코 지정 후 멸실가옥에 대해 복원이 이뤄진 경우는 아직 없다고 한다. 실제적인 지원이 필요한 대목이었다.
한편, 이 마을 가옥의 부분 수리나 전체 수리의 경우 집을 고치는 비용은 집을 보수할 근거가 충분하면 문화재청에서 전액 지원하고 있다. 지정된 범위 내에서 원래 가옥의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수리한다. 주택의 개보수를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불편하지만 마을 전체 주민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주민들이 더욱 많아지고 여러 경제 활동도 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외지인들이 정착을 원할 경우 현재는 그 일가들이 주선을 하곤 합니다. 외지에서 이 마을로 들어오고 싶어도 집이 없는 상황이지요”
“지금도 매년 동제때 줄다리기를 하는데요, 윗마을이 이기면 동네가 편안하고 아랫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된다는 의미니까 어느 동네가 이기든 좋은 것이죠. 이런 것들이 큰 갈등없이 지금까지 평화로운 마을이 유지되는 원동력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