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이 좋아, 짬뽕이 좋아? 식 논쟁은 탕수육을 둘러싼 소위 ‘부먹(소스를 부어먹는)’·‘찍먹(소스를 찍어먹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여태 잘만 먹던 탕수육이 어느 순간 논란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 것은, 그것이 먹는 방식 곧 선호(選好)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데 무슨 거창한 철학이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누구는 그냥 부먹이 좋다는 거다. 누구는 찍먹이 진리라는 거고.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식의 답 없는 논쟁을 완전히 종식시킬 해답을 찾았다 길래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름하여 ‘깔먹’이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탕수육 소스를 접시에 붓는다. 그 위에다 탕수육을 얹는다. 와, 정말 쉽다. 그러면 찍먹파는 그냥 위에 있는 탕수육을 집어먹으면 되고, 부먹파는 밑에 있는 걸 골라먹으면 된다. 왜 진즉에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콜럼버스의 달걀이 막 떠오른다. 사실 소스를 요리 위에 붓는 행위로부터 논란이 시작된다는 걸 우린 눈치 채질 못했다. 그러니 탕수육을 주문하면서 이걸 찍어먹어야 하나 부어먹어야 골치 아픈 건 당연히 우리 몫이었다.
깔먹이 위대한(!) 점은 해답을 탕수육 접시 안에서 찾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 범위를 요리하는 과정으로 확대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걸 아주 심각하게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문제를 낸 사람 그 머릿속에서 해답을 찾아야지, 주야장천 문제만 바라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중학교에서는 문제 속에 답이 다 있다고 배웠지만 현실은 다르다.
어느 외국 영화에서 딱 이런 장면이 나온다. 삶이 고달파 정신병원에 자진해서 들어간 멀쩡한 주인공한테, 정신이 온전치 않게 보이는 어느 늙은이가 앙상한 손가락을 펴며 기습적으로 묻는다. “이 손가락이 몇 개로 보여?” 일격을 당한 듯 놀란 주인공은 노인이 치켜든 네 개의 손가락을 보고는 그것도 모르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네 개요.” 하니 안됐다는 표정의 노인은 “여기 또 정신병 환자 하나 들어왔구먼”하고 혀를 끌끌 찬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그 노인의 방에 들어가 다시 한번 물어본다. “그때 어르신이 펴신 손가락은 네 개였잖아요!” 그랬더니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 손가락을 보지 말고, 날 보란 말이야” 코앞에 떨어진 문제만 보지 말고 문제를 낸 그 사람 마음을 보라는 것 같다. 마치 시험 문제를 받아 든 학생 눈 말고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주문처럼.
주인공은 선명한 손가락 너머 흐릿한 어르신 얼굴에 집중했다. 흐릿한 얼굴이 더 선명해질수록 손가락은 그만큼 희미해져 간다. 착시(錯視) 효과 때문인지 분명 네 개였던 손가락이 여덟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주인공은 “여덟 개인가요?” 하니 노인은 활짝 웃으며 “오호, 그거 멋진 답인 걸?” 한다. 주인공은 유일한 정답(right answer)을 찾으러 왔지만 노인은 이렇게 지혜로운 답(good answer)을 알려준다. 사실 노인은 머리를 너무 많이 사용하여 입원하게 된 천재병 환자였던 것이다. 지식적 측면에서 보면 정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만 지혜라는 측면에서 답은 다양할 수 있다는 금구(金口)를 듣게 된 주인공은, 환자들의 병에 ‘웃음’이라는 처방을 시도한 미국 최초의 의사가 된다. 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우리 사는 세상은 늘 다양한 문제로 가득하다. 불행히도 이들을 깔끔하게 해결할 결정적 한방은 없다. 세상이 그렇게 평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면 문제가 아무리 입체적이고 고차 방정식으로 꼬여 있더라도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 뒤의 보이지 않는 본질에 가닿을 수 있어야 한다. 천재 노인의 손가락 비밀을 알게 된 의사도 문진(問診)을 돌 때, 여느 의사들처럼 병은 언제 생겼으며 증상은 어떤지 묻지 않는다. 환부만 살피던 눈을 들어 환자와 눈을 맞추며 이렇게 묻는다. “당신 이름은 뭔가요?” 손에 든 차트에 분명 적혀 있을 텐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