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을 식히듯 연잎사귀 길을 따라 당도한 동궁과 월지, 못 안 가득 보름달 풍덩 멱 감고 있다. 물가에 얼비친 목조 누각 수려한 풍광에 싸여 연못에 빠진 달빛, 눈으로 가슴으로 건져 삶의 여유 누리려는 관람객들의 발길 그 옛날 왕족의 나들이로 한가롭다. 밤이슬 젖어 오므린 수련입매, 더위를 굴리듯 달빛 타고 수면 위를 시원스레 핥고 있다.
둥근 달빛에 채색된 궁궐 뜰 푸른 잔디마당 동그랗게 박힌 주춧돌, 기댈 배흘림기둥 없이도 석축호안 둘레길 달못은 고즈넉한 품새로 은은하다.
통일신라 원지(苑池) 대표 유적 월지,【삼국사기】문무왕 14년(674)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으며, 19년(679)에 궁궐을 중수하여 장려(壯麗)를 극하였다는 기록이다.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 라는 당(唐) 의 연호 문자가 새겨진 기와, 조로2년(調朝露二年)(680) 벽돌 출토유물에 근거하여 679년 착공하여 680년 완공된 것으로 추정한다. 최치원 『사산비명』 *금석문 ‘지증대사비문’에 ‘월지궁’이 전한다. 신라 49대 헌강왕 7년(881) 지증대사가 어명을 받고 월지궁에 초대 되었다. 못 안에 달빛이 잦아들 무렵, 우연히 심금을 파고드는 풍광에 넋을 빼앗길 쯤 헌강왕과의 선문답 심(心)에 던진 화두, 달빛 오묘하고 은근하게 비친 못 안을 다만 고요히 묵상하던 지증대사가 하늘을 우러러 침묵의 깨우침을 토로하듯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고하자 헌강왕은 흔쾌히 공감대를 형성하며 교감으로 소통하기를 “부처가 연꽃을 들어 뜻을 나타냈거니와, 전해오는 유풍여류(遺風餘流)) 전통이 진실로 이에 합치되는구려!” 제배(除拜)하여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문헌으로 보아 옛 부터 심금을 울릴 만큼 품격서린 쉼의 공간, 피안의 세계로 월지 달못의 밤경치는 아름다웠으리란 짐작이 간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 어디에도 안압지라는 연못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1145) 연못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궁 안의 못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라는 견해다.
신라왕조 패망 시 마지막 56대 경순왕 【삼국유사】 기이편 김부대왕조, 무자년(戊子:928) 봄 3월에 고려태조 왕건이 50여 기병(騎兵)을 대동하고 서울로 들어왔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까지 나가 영접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희를 베풀었다. 주연이 무르익어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내가 부덕한 탓으로 하늘이 돕지 않아 침략을 당해 재앙을 불러 일으켰고 나라가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견훤이 난폭한 폭군으로 국가를 망쳐 놓았으니 얼마나 분통한 일입니까” 흐느끼며 비통해 하는 좌우로 신하들 모두 통곡하고 태조 왕건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의 뜻을 비쳤다고 전한다. 나라를 잃은 태자는 천년을 이어온 사직(社稷)을 전쟁도 한번 치르지 않고 항복한 부왕을 하직하고, 삼베옷을 걸치고 개골산으로 떠나 풀뿌리와 나물로 연명한 마의태자(麻衣太子)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 한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935) 10월에 백성을 다치지 않고 평화적 정권 이양을 위해 시랑 김봉휴를 시켜 국서를 태조에게 보내 나라를 물려준 경순왕은 태조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난세에 비유 산란공주로 호칭)와 재혼, 신라를 두고 떠나갈 수밖에 없었기에 (경기도 연천군 경순왕능이 있슴) 왕조가 패망한 뒤 조선시대 이르러 폐허가 된 연못에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고 오리와 기러기가 한가로이 노니는 것을 보고 기러기 안(雁) 오리 압(鴨) 안압지로 불리어졌고, 조선시대 성종 17년(1486)편찬 된 신증동국지승람, 경주부(慶州府) 고적(古蹟),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안압지(雁鴨池) 명칭이 씌어져 있다.조선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시문(詩文) 안하지구지(安厦池舊址) 착지위해장어라(鑿池爲海長魚螺) 못을 파서 바다를 만들고 고기와 소라 길러 인수용후급아(引水龍喉芨我) 물을 끌던 용의 목 그 형세 우뚝하여라. 차시신라망국사(此是新羅亡國事) 이는 신라 망국의 일이건만 이금춘수장가화(而今春水長)嘉禾) 지금의 봄, 물은 풍족하여 좋은 벼를 기르도다.조선 말기 한학자 강위의 시 십이봉저옥전황(十二峯低玉殿荒) 무산 십이봉은 낮아지고 아름다운 전각은 황폐해 졌는데, 벽지의구안성장(碧池依舊雁聲長) 기러기 길게 우는 푸른 못은 옛날과 다름없어라. 막심천주소향처(莫尋天柱燒香處) 천주사 분향한 곳 찾지를 마오, 야초흔심내불당(野草痕深內佛當) 들풀에 깊이 묻힌 내불당 자취. 안압지란 명칭은 사유록(四遊錄)에 수록된 김시습의 시 안하지구지(安夏池舊址)에 나오는 안하지가 비슷한 한자음인 안압지로 바뀌었다는 추정과, 강위의 시에서 보는 것처럼 허물어진 월지에 갈대와 부평초 무성한 사이로,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것을 본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에 의해 불리어진 견해가 있다. *역주(譯註) 한국고대금석문(韓國古代金石文) 제2권 신라1·가야 편, 재단법인(財團法人) 가낙국사적개발연구원(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