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을 지키며 자손의 번영과 가학을 계승한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아들로 부친께서 정미사화(丁未士禍)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될 때 지극정성으로 효심을 다하고, 부친 사후에 뛰어난 학행으로 회재의 학문과 행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전력한 인물이다. 사후에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되고 장산서원(章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장산서원은 1780년(정조4) 영천군 임고면 장산리에 창건되었으나, 1868년 훼철되었고, 최근 2007년 4월 독락당에서 북쪽으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 재건되면서, 지방 유림의 형성과 적서(嫡庶)간 향전(鄕戰)연구에 귀중한 장소가 되고 있다. 1984년 5월 독락당 앞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잠계이전인기적비(潛溪李全仁紀蹟碑)’를 세웠는데, 성균관장 박성수가 비문을 짓고, 후손 이석근이 글씨를 썼다. 그동안 잠계선생에 대한 학문적 평가는 자료의 소략함과 서자출신의 신분 그리고 지역유림의 지엽적 문제봉착 등으로 아주 미비하였지만, 최근에 와서야 학위논문과 학술연구 등이 다소 이뤄지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재조명되고 있는 실정이다.
잠계는 스스로 자신의 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고, 훗날 금곡(錦谷) 송내희(宋來熙,1791~1867)는 「潛溪李公行狀」을 지으며, 아래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자서(自序)-『潛溪遺稿』「自序」내 어찌 일찍이 호(號)가 있었겠는가? 신유년(1561) 가을에 도산 퇴계 이황선생을 찾아가 뵈었는데, 선생께서 “그대는 호가 있는가?” 하기에, 나는 재배(再拜)하고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자, 선생께서 “나를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재배하고 돌아왔다. 세초(歲初)에 ‘옥봉(玉峯)’․‘옥계(玉溪)’ 두 가지 호를 써서 편지로 선생께 여쭈었는데, 선생께서 답하길 “두 가지 호 모두 좋다. 다만 회재선생께서도 평소에 비록 산명(山名)으로 자호(自號)하지 않았다. 그런데 옥산서원을 짓고서 또한 조정에서 산명으로 사액(賜額)하지 않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라 하였다.
가령 이 호[옥봉․옥계]를 피하고 계산(溪山) 중에 가장 애상(愛賞)한 것을 취하라는 글을 받드니 지극히 황송함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고을의 언덕․골짜기․바위․물․굽이․모퉁이 하나하나 부친께서 유식(遊息)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거듭된 호로 장구(杖屨)의 유적을 감히 더럽힐 수가 없고, 또한 끝내 한 글자의 칭함도 없이 도산선생께서 보살피고 사랑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오직 저 면천(眠川)의 한 굽이가 이미 깊고 그윽하여 선조의 사적에 들어가지 않으니, 이로써 호를 삼으면 아마도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면(眠)’자는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취할 바가 아니고, 반면에 ‘면(眠)’자는 ‘잠(潛)’으로 풀이되고, 옛사람 역시 일찍이 그곳을 잠계(潛溪)로 칭한 적이 있었으니, 오직 이 두 글자는 나의 호로 삼기에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다. 장차 도산선생께 다시 여쭙겠다. 융경2년 무진(1568) 3월 16일 잠옹(潛翁)이 스스로 서문을 짓다.
이 문서는 보물 제1473호 여주이씨 옥산문중 고문서로 경주 옥산 여주이씨 독락당·치암 종택·장산서원에 소장되어있으며, 『잠계유고』의 「자서(自序)」와 동일한 내용이다. 다만 문집 간행을 위해 옮기는 과정에서 3곳(1.有言曰을 先生有言曰/2.一石一潭을 一石一水/3.稟於陶山을 稟于陶山)의 차이점이 발견되지만, 산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潭보다는 水를 선택하며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지극한 이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잠계(潛溪)’라는 명칭은 면천·민내·민내골·미내곡동·면내곡·잠계 등으로 불리며, 독락당의 북쪽 상류의 계곡(현재 장산서원 위쪽)을 말한다. ‘잠(潛)’은 잠계선생이 배회한 공간이면서, 선조의 사적이 미치지 않은 깊은 산속의 계곡을 지칭하며, 고자(古字)로 ‘면(眠)’과 통용된다. 실제로 면천·잠계 등으로 불린 정황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계(溪)’는 옥산·옥봉 등 산의 명칭보다 물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퇴계는 옥봉․옥계의 호가 좋다고는 하지만 중첩을 피하길 원하였고, 잠계선생 역시 퇴계선생의 진정한 마음을 위해 제시한 두가지 호에서 한 글자를 뽑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즉 ‘잠계’는 선조의 유업과 자신의 활동공간[潛]을 포괄하면서 회재의 제자인 퇴계의 진정한 마음이 담긴 글자[溪]를 합한 것으로, 퇴계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부친께서 활동하신 독락당의 상류인 면천[잠계]을 자신의 호로 삼아 학업의 신장과 가업계승을 동시에 이루고자한 의도를 볼 수 있다.
퇴계와 잠계는 1562·1566·1567·1568년 등 여러 차례 편지를 통해 안부와 실정에 대해 살폈고, 1566년 퇴계는 회재선생의 행장을 지었다. 잠계는 1561년 부상으로 안동에 물러나있는 퇴계선생을 찾아 호에 대한 화두를 받았고, 이듬해 편지글에서 퇴계는 지난 가을 다녀간 일을 놓고 완연한 규범을 대한 듯 반가움을 표현하였다. 아쉽게도 잠계선생은 무려 7년이란 긴 시간동안 호에 대해 고민하며 ‘잠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만, 1568년 3월 글을 짓고는 여름에 운명하였다.